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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재의 밀담

국군 뿌리는 광복군이라면서 왜 철기의 청산리 전투는 홀대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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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철재 기자 중앙일보 국방선임기자 겸 군사안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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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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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쯤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 백운평. 북로군정서 제2제대 600명이 숨을 죽이며 매복하고 있었다.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제2제대장 철기(鐵驥) 이범석의 총성에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고꾸라졌다. 독립군 600여 명은 일제사격을 시작했다. 26일까지 청산리 계곡 곳곳에서 벌어진 청산리 전투의 시작이었다.

항일 무장투쟁사도 편가르기 의혹 #문 정부, 봉오동 전투 상대적 부각 #정권 주도하는 ‘역사 바로 세우기’ #100주년 맞는 청산리 전투 빛바래

항일 무장투쟁사상 최대 승전인 청산리 전투가 100주년을 맞았다. 그런데 기념행사는 ‘비교적’ 조용하게 치러졌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날을 세우고, 국군의 뿌리를 광복군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 문재인 정부라면 대대적으로 띄울 만한데도 말이다. 의외다. 24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정세균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인사·독립유공자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청산리대첩 전승 제100주년 기념식’이 열렸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는 없었다. 왜 그럴까.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독립군. 맨 앞에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이 김좌진 장군. [사진 독립기념관]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독립군. 맨 앞에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이 김좌진 장군. [사진 독립기념관]

21일 한국광복군동지회가 주관한 ‘한국독립군 3대 대첩 제100주년 기념식’에서 단서를 찾아보자. 3대 대첩은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전투를 뜻한다. 대전자령 전투는 1933년에 있었다. 청산리 전투를 따로 떼어내기보다는 봉오동 전투와 한데 묶으려는 게 여권의 의도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특히 문 대통령은 틈만 나면 봉오동 전투를 언급했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인 6월 7일 “100년 전 오늘,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이 이끈 우리 독립군이 중국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정규군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며 “승리와 희망의 역사를 만든 평범한 국민의 위대한 힘을 가슴에 새긴다”고 적었다.

올해 3·1절엔 “독립군은 독립투쟁 최초로 전면전을 벌여 대승을 거뒀다. 바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겠다는 사업인데,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늦어지고 있다.

정세균 국무총리(가운데)가 24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 청산리대첩 전승 제100주년 기념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사진 국가보훈처]

정세균 국무총리(가운데)가 24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 청산리대첩 전승 제100주년 기념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사진 국가보훈처]

문 대통령은 지난달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평전』을 독서의 달 추천도서로 권장했다. 관련 사정을 잘 아는 정부 소식통은 “문 대통령이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며 “언제부터 공식 문서엔 ‘봉오동·청산리’로 쓰고 있다”고 귀띔했다. 봉오동 전투는 지난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여당의 실세 국회의원이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모두 독립전쟁에서 거둔 소중한 승리다. 그러나 전과나 의의를 놓고 청산리 전투가 일제를 상대로 한 승리 가운데 으뜸이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연합한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제에 대승을 거뒀다. 일제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일제의 공식 기록엔 전사 7명, 부상 15명으로 각각 나왔다. 하지만 전상을 포함한 환자가 875명이란 보고도 있기 때문에 일제가 전투 피해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크다(『군인 이범석을 말한다』).

청산리 전투는 막 불이 붙은 항일 무장투쟁의 불씨를 지켰다는 평가다. 1920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50여 개의 항일 무장단체가 국내 진공작전을 폈다. 일본군은 6월 4일 삼둔자 전투와 같은 달 7일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의 기습에 패했다. 일제는 독립군의 뿌리를 뽑고자 조선군·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관동군을 긁어모아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준비했다. 1만8000~2만 명 병력에 당시로선 첨단 무기인 항공기도 동원했다.

참패한 일제는 분풀이로 3600명의 양민을 학살했다. 이범석장군 기념사업회의 박남수 회장(예비역 육군 중장)은 “청산리 전투는 경술국치 후 10년의 일제 강점에 큰 타격을 줬고, 항일 무장투쟁을 광복까지 이어준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김좌진(左), 이범석(右)

김좌진(左), 이범석(右)

그런데도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항일 무장투쟁의 한 사례라는 게 문재인 정부의 관점으로 보인다. 짐작건대 정권의 역사 인식과 관련 있다. 여권은 홍범도-김원봉으로 이어지는 좌파 계열의 항일 무장투쟁도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문 대통령은 올 현충일 때 약산 김원봉을 거론하며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을 이뤄 광복군을 창설했다”고 말했다. 약산은 독립운동을 했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도 참여했다. 좌우 이념을 극복한 애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이라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나중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인물이 상대적으로 빛이 바랬다. 바로 철기 이범석 장군이다. 청산리 전투 주역 중 한 사람인 그는 독립군과 광복군의 핵심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와 함께 국방부 장관을 맡으며 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광복군 출신을 특별 임관하고 육군사관학교 입교생 숫자를 늘렸다. 그러자 국군 장교단에서 일본군·만주군 출신의 비율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철기를 거친다면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과 광복군에 맞닿게 된다. 그런데도 철기를 치켜세우는 움직임을 문재인 정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그가 만든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 자유당 창당의 중심인 전력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철기가 군내 용공분자를 색출한 제1차 숙군을 단행해서가 아닐까.

정권의 속내는 헤아리기 힘들다. 그러나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려 한다면 먼저 역사 공부부터 제대로 하기를 주문한다.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