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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쇤베르크의 ‘불협화음’서 추상화 돌파구 찾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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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6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45〉

그저 예쁜 여자만 쫓아다니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를 좋아하는 예쁜 여자는 없었다. 그때 나는, ‘예쁜 여자는 변비를 앓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다. 전혀 예쁘지 않아도 변비로 고생하는 여자가 아주 많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지만, 내 예쁜 여자에 대한 편견은 변하지 않았다. 한심한 ‘여우의 신포도’ 현상이다. 사회심리학은 이를 ‘인지부조화이론’으로 발전시켰다.

클링거·클림트, 청각의 시각화 한계 #“화음·불협화음은 익숙함 차이뿐” #쇤베르크, 파격적 온음계체계 부정 #칸딘스키 ‘인상 3’ 그림으로 화답

195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페스팅거는 정말 지루한 실험을 한 뒤 A집단에는 1달러를 주고, B집단에는 50달러를 줬다. 그리고 “실험이 재미있었느냐”고 물었다. 흥미롭게도 A집단의 피험자들만이 “재미있었다”고 대답했다.

페스팅거는 이 황당한 결과를 ‘인지부조화’의 해결로 설명했다. 겨우 1달러를 받으려고 그 지겨운 실험을 참아낸 자신에게 화가 난 피험자들이 편안해지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실험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존감’과 ‘1달러’ 사이의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려고 이따위 무모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부조화’는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음악의 ‘불협화음’도 마찬가지다(‘부조화’와 ‘불협화음’은 둘 다 ‘dissonance’다). 반드시 ‘협화음’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이 당연해 보이는 원칙을 거부했던 음악가가 있다. 아르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1874~1951)다.

"‘협화음’‘불협화음’ 대립하는 건 아니다”

1 칸딘스키. 2 쇤베르크의 ‘파란자화상’ (1910). 쇤베르크는 자신의 무조음악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화가로의 전업을 생각하기도 했다. 3 쇤베르크의 악보. 4 칸딘스키의 ‘인상 3’. 부제가 ‘연주회’로 되어 있는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음악회를 다녀온 후, 그 감동을 ‘반기하학적, 비논리적’으로 그렸다.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1 칸딘스키. 2 쇤베르크의 ‘파란자화상’ (1910). 쇤베르크는 자신의 무조음악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화가로의 전업을 생각하기도 했다. 3 쇤베르크의 악보. 4 칸딘스키의 ‘인상 3’. 부제가 ‘연주회’로 되어 있는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음악회를 다녀온 후, 그 감동을 ‘반기하학적, 비논리적’으로 그렸다.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클링거, 클림트가 시도했던 청각의 시각적 이미지화, 즉 음악과 회화의 감각 교차양상은 한계가 뚜렷했다. ‘대상의 재현’이라는 한계다. 비록 상징이나 기호로 매개된 이미지였지만, 여전히 화폭에 구현된 대상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음악은 달랐다. 외부세계와 상관 없는 음악은 그저 작곡가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어떤 대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음악은 화가들에게는 엄청나게 부러운 영역이었다.

그러나 음악이라고 무한정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음악에는 지켜야 할 내재적 규칙이 있었다. 그림은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그릴 수 있으나, 작곡은 ‘조성’이라는 음악의 내재적 규칙을 배우지 않으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기준을 잡는 하나의 음, 즉 ‘으뜸음’이 있고, 선율이나 화성은 이 으뜸음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이들 음들을 편집하는 방식도 ‘화성학’이라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야 한다. 7개의 음이 편집된 장음계와 단음계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음악의 온음계체계는 17세기 무렵 확립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특정한 음계 내에서는 서로 어울리는 음들이 있다. 편안한 느낌을 준다. ‘협화음’이다. 선택된 음계에 속하지 않은 음들의 조합이 연주되면 불편하다. ‘불협화음’이다. 불협화음은 긴장과 불안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불협화음은 반드시 협화음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불협화음이 꼭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마냥 편안한 화음만 지속되면 지루하다. 적당한 긴장을 위해서는 불협화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반드시 협화음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 당연하고 오래된 규칙에 딴지를 건 사람이 바로 쇤베르크였던 것이다.

쇤베르크는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구별은 단지 익숙함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화성적 원칙들이 인간의 본능이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창조적 사고의 치명적 전제가 되는 구성주의적 사고다. 이렇게 보면, ‘자존감-1달러’의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려는 심리적 기제도 문화적 습관에 불과한 것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지부조화’의 모순적 상황을 잘 견뎌야 ‘성숙한 인격’으로 여겨지는 상황이나 문화도 있다.

‘협화음’과 ‘불협화음’은 단지 습관의 차이일 뿐,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쇤베르크의 주장은 파격적이었다. 수백 년 동안 다양한 기법을 축적하며 발전해 온 온음계체계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해진 음들의 조합이 그저 습관에 불과하다면 반드시 7음만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피아노의 7개의 흰건반과 5개의 검은 건반 중 어떤 것이나 자유롭게 선택해 쓸 수 있다. ‘12음기법’이다.

물론 쇤베르크의 ‘12음기법’에도 그 나름의 규칙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낯선 규칙’이다. 기존 화성학에 규정되지 않은 화성을 사용한다고 해서 화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저 익숙하지 않은, 또 다른 화성일 뿐이다.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1911년 1월 2일 뮌헨에서 열린 연주회에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소문은 듣고 있었다. 칸딘스키는 첼로와 피아노에 익숙한 아마추어 음악가였고, 쇤베르크는 화가로 전업을 생각할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다. 쇤베르크의 음악회에 참석하기 전, 칸딘스키는 프란츠 마르크, 헬무트 마케와 함께 야브렌스키 부부의 집에 모여 신년파티를 했다.

자신이 창립한 뮌헨 신미술가협회의 구성원들과의 갈등에 싫증이 났던 칸딘스키는 보다 자유롭게 자신이 추구하는 추상회화의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당시 그는 완전추상이 자칫 잘못하면 ‘넥타이나 양탄자의 장식’으로 추락할 위험성에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파티 후에 함께 간 쇤베르크의 음악회에서 칸딘스키는 바로 그 돌파구를 번갯불처럼 깨닫게 된다. ‘불협화음’이었다! 음악회 팸플릿에는 그해 출판 예정인 쇤베르크 『화성학』의 다음과 같은 핵심문구가 실려 있었다. “불협화음과 협화음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것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협화음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구별하지 않는다. 아니면 적어도 협화음을 그렇게 기꺼이 사용하지 않는다.”

쇤베르크의 현악사중주 2번과 피아노곡, 그리고 가곡 몇 곡이 연주되었다. 음악회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신문에 실린 연주회 리뷰 또한 죄다 야유와 비웃음이었다.

반기하학적, 비논리적 아름다움의 미학

그러나 칸딘스키에게는 달랐다. 익숙하고 편안한 화음으로 회귀하는 대신, 불협화음을 구성하는 ‘각각 음들의 독자적인 생명’의 낯선 화성을 아무 주저함 없이 발표하는 쇤베르크의 연주회에서 칸딘스키는 자신이 지향해야 할 추상회화의 편집가능성을 찾았던 것이다.

보름 정도가 지난 1월 18일에 쇤베르크에게 편지를 썼다. 거의 연애편지 수준이었다. “우리의 노력,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과 느낌은 너무 비슷해서, 이렇게 제가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칸딘스키는 자신이 추상회화에 적용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음악에 존재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바로 그것을 쇤베르크의 그 음악회에서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이 편지에서 칸딘스키는 음들의 독자적 생명을 가능케 하는 쇤베르크의 화성학을 자신의 추상회화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구성’이란 에디톨로지적 개념을 쓰고 있다.

칸딘스키는 먼저 기하학적 형태 위에 리듬을 쌓으며 구성주의적 방식으로 새로운 화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당시 화가들 사이에 유행한다면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큐비즘을 염두로 한 듯한 이야기를 꺼낸다. 동시에 자신은 그러한 경향에 절반만 동의한다고 쓴다. 이후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몬드리안의 데 스틸 운동으로 이어지는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칸딘스키의 거부감은 이미 이때부터 분명했다.

그러나 ‘구성’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이 이제라도 회화에서 구현되고 있음은 다행이라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구성이란 ‘반기하학적, 비논리적’인 방식에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반기하학적’ ‘비논리적’인 구성의 가능성이 쇤베르크의 ‘불협화음’에 있다는 것이다. 칸딘스키는 자신과 쇤베르크의 공통점을 ‘예술에서의 불협화음’이라고 정의한다.

연주회 이후 며칠 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던 칸딘스키는 그날의 감동을 ‘인상 3(Impression III)’으로 그렸다. 부제는 ‘음악회’다. ‘반기하학적, 비논리적’ 화성의 실험으로도 볼 수 있는 이 그림에는 검은색의 피아노가 그날의 음악회를 암시하고 있다. 피아노 주위의 노란 색은 검은 피아노를 감싸고 있다. 노란 소리는 화면 아래쪽의 회색과 부딪히기도 하고, 붉은색 얼룩과 검은색 선의 동요하는 청중들과 ‘비논리적’으로 엉켜있다.

칸딘스키는 이듬해 ‘청기사연감’에 ‘노란소리’라는 제목의 ‘종합예술’ 작품을 수록한다. 아울러 쇤베르크의 글과 악보를 싣기 위해 편집 기간을 늦추기도 한다. 칸딘스키와 쇤베르크의 우정은 그로피우스와 이혼하고 빈으로 돌아간 알마 말러가 ‘칸딘스키는 반유대주의자’라는 악소문을 퍼뜨리는 1923년까지 계속된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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