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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잡지 편집 경험이 추상화 ‘밑그림’ 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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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4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44〉

어느 정치인이 포털 사이트의 기사 편집을 문제 삼아 관련자에게 ‘들어오라’고 하는 문자가 공개되어 난리가 났다. 포털 사이트 측은 “뉴스 편집은 인공지능(AI)이 한다”고 대답했다. 과연 그럴까?

잡지서 탄생한 ‘유겐트슈틸’ #뮌헨을 전위적 도시로 만들어 #튀는 잡지 ‘청기사 연감’ 출판 #공감각적 예술의 기초 닦기도

인공지능은 그 시스템을 설계한 이의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하여 윤리적·도덕적 가치판단을 내려 기사를 선택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도대체 그게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해당 정치인의 고압적 태도와는 별개로, ‘인공지능’의 능력에 관한 판단은 그 정치인이 옳다. 즉 포털 뉴스의 편집은 전적으로 해당 포털 사이트를 프로그래밍한 사람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다. ‘편집’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인터넷 포털의 등장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영역은 오프라인 인쇄 매체 시장이다. 특히 ‘종이 잡지’가 그렇다. 잡지가 했던 역할은 이제 다양한 형태의 SNS가 다 한다. 잡지 그리고 인터넷 포털과 SNS의 본질은 ‘편집’이다. 각 개인이 죄다 ‘편집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들어오라’ 사건의 본질은 정보의 ‘편집성’에 대한 메타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팩트 체크’의 객관성을 이야기하면서, 왜 하필 그 팩트만을 골라서 체크해야 하는가의 주관성, 혹은 당파성은 주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혼란은 바로 이 ‘편집성’에 대한 질문의 회피에서 비롯된다. ‘편집성’을 인정하는 순간, 내용의 절대성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장을 상대화해야 소통이 가능하다.

유겐트슈틸엔 ‘젊은 스타일’ 의미도

1 칸딘스키의 애인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칸딘스키의 초상화(1908). 2 전혜린의 작품 속 배경으로 잘 알려진 뮌헨의 슈바빙 거리. [사진 윤광준],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1 칸딘스키의 애인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칸딘스키의 초상화(1908). 2 전혜린의 작품 속 배경으로 잘 알려진 뮌헨의 슈바빙 거리. [사진 윤광준],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잡지는 ‘편집성’을 분명히 하는 매체다. 잡지는 영어로는 Magazine, 불어로는 Journal, 독어로는 Zeitschrift의 번역어다. 서양에서 잡지가 처음 나타난 것은 1665년의 일이지만, 대중적 인쇄 매체로 본격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다. 인쇄술의 발달로 책의 출판이 가능해졌지만, 책은 극히 제한된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잡지가 나타나면서 지식의 대중적 공유가 가능해졌다.

‘잡지(雜紙)’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이는 일본의 서양학자 야나가와 슌산(柳河春三)이다. 1876년에 Magazine의 번역어로 ‘섞일 잡(雜)’과 ‘종이 지(紙)’를 처음 사용한 것이다. 그는 영어 ‘Magazine’을 ‘온갖 종류의 지식이 인쇄된 종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저 잡스러운 지식의 집합만으로 ‘잡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잡지의 내용이 지향하는 일정한 방향성이 존재해야 한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 다양한 저자의 글을 편집해 출판하는 잡지에서는 지식의 ‘편집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읽어야 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주목을 끌고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편집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편집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편집 과정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명확해지는 메타인지적 통찰의 경험을 가능케 한다. 제체시온에 참여한 예술가들이 앞 다투어 잡지를 편집했던 이유다. 특히 뮌헨 제체시온의 잡지는 특별했다.

1892년, 제체시온 운동을 처음 시작한 뮌헨 제체시온 예술가들은 잡지가 가진 ‘편집력(編輯力)’을 최대한 활용했다. 독일어로 ‘청년’을 뜻하는 ‘유겐트(Jugend)’라는 예술문학잡지를 1896년에 창간한 것이다. 미술시장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보수적 예술가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고 싶은 독일 남부와 빈의 예술가들이 대부분 참여한 이 잡지에는 아르누보식 장식이나 삽화와 더불어 인상주의 그림들과 비평들이 실렸다.

잡지 ‘유겐트(Jugend)’ 표지.

잡지 ‘유겐트(Jugend)’ 표지.

잡지가 가진 ‘편집력’에 대한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바로 이 잡지에서 독일판 아르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이 탄생했다. ‘유겐트슈틸’이란 바로 이 잡지 ‘유겐트’의 ‘양식(슈틸)’이란 뜻이다. 동시에 ‘젊은 스타일’이라는 이중적 의미도 갖는다. 이 ‘젊은 스타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변증법적으로 진화한 결과가 바로 1919년의 ‘바우하우스’다.

화가들이 주로 참여한 ‘유겐트’와 더불어 문학가들의 놀이터였던 잡지 ‘심플리치시무스(Simplicissimus)’는 당시 뮌헨을 독일에서 가장 전위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유겐트’와 같은 해에 창간된 이 사회비평주간지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 에리히 케스트너 같은 작가들이 참여했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가스등이 낭만적으로 표현된 뮌헨의 슈바빙(Schwabing) 거리는 이 ‘유겐트’와 ‘심플리치시무스’ 작가들의 흔적들로 만들어진 곳이다. 러시아의 법학도였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가 그림을 공부하러 이 ‘예술로 빛나는 도시’로 온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예술가 칸딘스키의 삶은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뉜다. 1896년~1914년의 뮌헨, 1차 세계대전으로 고국으로 돌아가 혁명의 파도를 겪었던 1914년~1921년의 러시아, 독일로 돌아와 바우하우스 선생으로 지냈던 1922년~1933년의 바우하우스, 그리고 말기의 삶을 지냈던 1933년~1944년의 파리 시기다.

젊은 칸딘스키는 법학 교수 초청도 마다하고 예술가의 꿈을 이루려 뮌헨에 왔지만,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뮌헨 제체시온의 리더 프란츠 폰 슈투크가 있던 뮌헨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4년을 기다려야 했다. 1900년 겨우 슈투크의 제자가 되었지만, “색을 남발한다”는 비판만 받았다. 지도도 자주 받지 못했다. 결국 1901년 가을, 칸딘스키는 학교를 자퇴했다.

이 무렵 뮌헨 제체시온 내부에는 지나치게 장식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유겐트슈틸에 반대하는 또 다른 그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칸딘스키의 남다른 리더십이 발휘된다. ‘팔랑크스(Phalanx)’라는 예술가 그룹을 조직하고,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은 이름의 사설 미술학교를 세운 것이다. 칸딘스키가 받았던 불과 몇 년 되지 않는 정규 미술교육의 이력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칸딘스키의 사설 미술학교에는 정규 미술학교에 입학하기 어려웠던 여학생들이 주로 입학했다.

팔랑크스 예술가 그룹과 학교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04년 해체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칸딘스키는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 1877~1962)다.

당시 칸딘스키에게는 러시아에 이미 부인이 있었다. 뮌터는 그로피우스의 알마 말러와는 정반대의 여인이었다. 지극히 헌신적이었다. 팔랑크스가 해체되자 칸딘스키는 뮌터와 이탈리아·북아프리카·파리·베를린 등을 여행 다니며 방랑의 시간을 보낸다. 사랑의 도피였다. 러시아 아내와 이혼하는 과정의 복잡한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8년 칸딘스키와 뮌터는 바이에른 지방 슈타펠 호수 인근의 무르나우라는 작은 마을 산기슭에 집을 사서 정착했다. 이 집과 뮌헨을 오가며 칸딘스키는 ‘뮌헨 신미술가협회’를 창립하고 또 회장이 되었다. 그는 ‘회장’이 직업이었다.

뮌헨 신미술가협회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구성원 대부분 독일 특유의 표현주의적 그림들을 그렸지만 칸딘스키는 ‘추상화’라는, 그때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그림을 그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발 좀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 달라”는 회원들의 요청에 칸딘스키는 열 받았다. 1911년, 뮌헨 신미술가협회의 전시회에 칸딘스키는 190cm x 275cm 크기의 추상화 ‘구성 5(Komposition V)’를 내놓겠다고 했다. 크기도 황당하거니와, 도무지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그림 내용 또한 회원 모두를 당황케 했다. 칸딘스키의 그림은 전시를 거부당했고, 칸딘스키는 이를 이유로 뮌헨 신미술가협회를 탈퇴했다.

사실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자신이 만든 뮌헨 신미술가협회를 탈퇴하기 위한 명분을 쌓기 위한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이 그림에 또 다른 제목을 붙였다. ‘최후의 심판’.

작곡가 쇤베르크와 교류 ‘공감각’ 터득

칸딘스키가 팔랑크스에서 뮌터를 얻었다면, 뮌헨 신미술가협회에서는 프란츠 마르크를 얻었다. 칸딘스키와 마르크는 뮌헨 신미술가협회를 함께 탈퇴하자마자 또 다른 예술가그룹을 만들었다.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다. 이 또한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끝났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획기적이었다. 앞선 두 번의 실패에서 얻은 학습 효과가 있었다. 일단 명칭이 왜 뜬금없는 ‘청기사’인가에 대한 질문에 훗날 칸딘스크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자신이나 마르크, 둘 다 푸른색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르크는 말을 좋아했고, 자신은 기사를 좋아해서 ‘청기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름을 정하는 과정만큼이나 청기사파의 활동은 심드렁했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방향성을 정하지도 않았다. 동조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칸딘스키와 마르크 이외에, 뮌터·야블렌스키·클레·마케 등 몇 명 되지 않았다. 전시회도 별로 열지 않았다.

이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잡지 편집’이었다. ‘청기사파’ 결성과 더불어 바로 착수한 것이 ‘청기사 연감(Almanach‘Der Blaue Reiter’)’이라는 잡지 출판이었다. 1912년 5월 발간된 ‘청기사 연감’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희한한 잡지였다. ‘유겐트’와 ‘심플리치시무스’로 형성된 뮌헨의 창조적 편집문화와 바그너의 ‘종합예술’ 이념이 교차하는 아주 특별한 잡지였다. 이 잡지 편집의 경험이 없었다면,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없었다. 이 잡지를 편집하며 칸딘스키는 쇤베르크라는 아주 특별한 인물과 교류했고, 그 덕분에 클링거나 클림트의 ‘감각의 교차양상’과는 차원이 다른 ‘공감각적 예술’에 대한 기초를 닦았다. ‘청기사 연감’은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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