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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평화조약과 목숨을 바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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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권의 아랍에미리트(UAE)와 바레인이 미국의 중재로 줄줄이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고 수교하면서 중동권에 새로운 화해 분위기가 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41년 전인 1979년 아랍권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고 관계 정상화를 이끌었던 안와르 사다트(1918~81년, 재임 1970~81년) 이집트 대통령의 용기와 결단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73년 중동전쟁 영웅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이스라엘 기습해 67년 6일전쟁의 치욕 씻어 #77년 아랍권 첫 이스라엘 방문해 국회 연설 #미 중재 이스라엘과 캠프데이비드 협정 맺어 #시나이반도 돌려받고 아랍권 첫 국교정상화 #재정난 속 빵 보조금 폐지로 폭동나자 결단 #경제발전 위해선 과감한 평화전략 필요 판단 #국익 위해 아랍권 비난과 외교적 수모 감수 #국내 이슬람주의자 반발 속에 81년 암살당해 #평화 위한 희생…민심 다독거리기 필요 보여줘

1978년 백악관에 모인 메나헴 배긴 이스라엘 총리,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그리고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부터).사진=위키피디아

1978년 백악관에 모인 메나헴 배긴 이스라엘 총리,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그리고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부터).사진=위키피디아

전쟁영웅, 평화 위한 ‘퍼스트 펭귄’으로

이집트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제1차 중동전쟁), 1956년 수에즈 동란(제2차 중동전쟁),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 전쟁), 1973년 욤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 이집트에선 10월 전쟁)에서 이스라엘과 맞선 아랍권의 군사강국이다. 아랍민족주의의 이념을 따르는 과정에서 상당한 인적·물적 피해도 감수했다.
사다트는 아랍권이 아랍연맹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이스라엘과 단독 평화조약을 맺는 것에 반대하는 ‘반이스라엘 카르텔’을 과감하게 깨고 평화와 국익(시나이 반도 반환)을 추구했다. 페르시아 만(아라비아 만) 지역의 군주국가를 중심으로 아랍권에 이스라엘과 평화·협력 분위기가 새롭게 고조되는 가운데 중동평화의 ‘퍼스트 펭귄’인 사다트의 리더십을 반추해본다.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 사진=위키피디아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 사진=위키피디아

패배주의·외세간섭·경제난 세 마리 토끼  

사다트는 이집트의 육군 장교로 자유장교단이 1952년 7월에 벌였던 쿠데타에 참가했다. 자유장교단은 이 쿠데타로 1807년부터 이집트를 통치하던 알바니아계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파루크 1세를 축출하고 생후 5개월 된 그의 아들을 국왕(아흐마드 파우드 2세)에 올렸다. 자유장교단은 이듬해인 1953년 공화제를 채택하고 왕정을 폐지했다. 자유장교단의 고참 장교인 무함마드 나기브(1901~84년, 재임 1953~54년)가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집트 역사상 2000여 년 만에 이 지역 출신이 지도자를 맡은 순간이었다. 이집트는 기원전 343년 페르시아가 고대 이집트의 제30왕조를 무너뜨리고 점령한 이래 2296년, 기원전 32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점령하고 그의 부하 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리스계 파라오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설한 이래 2285년 동안 외국, 외국인 군주, 외국 출신 군인의 지배를 받아왔다.
나기브는 곧 물러나고 자유장교단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가말 압델 나세르(1918~70년, 재임 1954~70년)가 대통령을 맡아 시리아와 통일아랍공화국(1958년 결성, 61년 시리아 탈퇴, 71년 폐지)을 이루는 등 아랍민족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나세르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까운 동료 사다트가 대통령에 올랐다. 사다트는 9년간 국회의장을 맡았으며 두 차례 부통령을 지냈다.
사다트는 1967년 6일 전쟁 패전으로 패배주의에 사로잡히고, 소련 군사고문단과 기술 전문가들의 간섭에 시달리고, 수에즈 운하가 막히면서 경제난까지 빠진 혼란의 나라를 물려받았다. 사다트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해법을 추구했다.

지난 10월 2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사다트 추모관 근처에서 주민들이 국기를 흔들며 1973년 이스라엘과 벌였던 10월전쟁(4차 중동전쟁 또는 욤 키푸르 전쟁의 이집트식 명칭))의 승리를 기념하는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지난 10월 2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사다트 추모관 근처에서 주민들이 국기를 흔들며 1973년 이스라엘과 벌였던 10월전쟁(4차 중동전쟁 또는 욤 키푸르 전쟁의 이집트식 명칭))의 승리를 기념하는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유대 종교휴일에 이스라엘 기습해 성공

사다트는 가장 먼저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전쟁을 기획했다. 이를 위해 1972년 7월 소련 군사고문단과 전문가들을 내보내는 기만전술을 펼쳤다. 이는 처음엔 양국 관계의 악화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여겼지만 나중에 이스라엘을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기만으로 확인됐다. 소련 군사고문단은 여전히 남아 이집트의 군사작전 수행을 도왔다.
그런 뒤 1973년 10월 6일~25일 아랍국가인 시리아와 손잡고 이스라엘을 상대로 욤 키푸르 전쟁을 벌였다. 유대인은 유대력으로 새해 열흘째인 욤 키푸르의 날에 속죄를 위해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예비군 소집을 통보하는 방송마저 쉰다. 유대인 종교휴일인 욤 키푸르의 날에 기습공격을 벌인 이집트 군은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스라엘 점령지인 시나이 반도 깊숙이 진군했다.
이집트는 긴급 출동한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를 소련제 지대공 미사일로 줄줄이 격추했으며, 그 막강하다는 이스라엘 기갑 부대를 격파하고 견고한 진지를 무너뜨렸다. 허를 찔린 이스라엘 군은 아리엘 샤론 장군이 이끄는 기갑사단을 동원해 역공을 펼쳤다. 샤론의 부대는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수도 카이로 쪽으로 진격하는 기동작전을 펼쳤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범아랍권 산유국은 ‘석유 무기화’를 들고 나와 미국과 서방을 압박했다. 사다트는 군사적·외교적 성공을 모두 거뒀다. 결국 이스라엘이 미국을 통해 중재를 요청하자 이집트가 응하고 소련도 동의하면서 전쟁은 19일 만에 끝났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기갑부대가 수에즈 운하를 가로지른 부교를 건너 이집트 본토로 향하고 있다. 당시 이집트군의 기습에 허를 찔려 항공과 기갑 전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이스라엘군은 필사적인 반격으로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간신히 휴전을 이룰 수 있었다. 적의 공격 징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정보 실패'가 전쟁 초기에 밀린 원인으로 분석된다. 사진=위키피디아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기갑부대가 수에즈 운하를 가로지른 부교를 건너 이집트 본토로 향하고 있다. 당시 이집트군의 기습에 허를 찔려 항공과 기갑 전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이스라엘군은 필사적인 반격으로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간신히 휴전을 이룰 수 있었다. 적의 공격 징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정보 실패'가 전쟁 초기에 밀린 원인으로 분석된다. 사진=위키피디아

한풀이하고 전쟁영웅으로…경제난 계속

이집트는 1967년 6일 전쟁에서 그야말로 엿새 만에 시나이 반도를 잃고 수에즈 운하를 경계로 삼는 바람에 국가의 주요수입원인 운하가 막히는 고통을 겪었다. 욤 키푸르 전쟁, 또는 10월 전쟁은 이러한 이집트의 국가적 한이 한 순간에 풀린 전쟁이다. 사다트는 이집트에서는 물론 범아랍권의 영웅이 됐다. 아랍권을 수에즈 운하를 횡단해 군대를 이스라엘 점령지로 들여보낸 그를 ‘횡단의 영웅’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집트 군도 이스라엘 군에 밀리기만 하는 오합지졸이 아니라 정밀한 작전을 펼쳐 이스라엘을 격파할 수 있는 현대 강군으로서 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사다트는 욤 키푸르의 영광에 취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으로 엄청난 국가재정 압박을 받고 있는 현실을 직시했다. 아랍권과 이스라엘 분쟁의 종식만이 이집트의 경제발전을 가져올 수 있음을 절감한 사다트는 행동에 나섰다. 전 세계에 군사적 실력을 과시한 사다트는 눈을 서방으로 돌렸다. 강한 이집트를 목격한 미국도 자세를 바꿨다. 1967년 6일 전쟁 뒤 이스라엘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미국 외교관을 추방했던 이집트는 1974년 2월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1978년 미국 워싱턴에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왼쪽부터)와 손을 잡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1978년 미국 워싱턴에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왼쪽부터)와 손을 잡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냉전상황에 미국의 경제·외교적 지원 얻어내

사다트는 냉전 상황을 유리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모스크바에 평화와 경제발전 지원을 요청하면서 워싱턴에도 신호를 보냈다. 당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1913~94년, 재임 1969~74년)은 ‘평화를 위한 투자’라는 이름으로 이집트에 두 가지를 모두 지원하기로 했다.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도는 순방외교를 펼쳤다. 그 결과 1974년 1월 수에즈 운하 통제권을 이집트에 돌려주는 협정과 1975년 2월 시나이 반도의 일부 유전의 관리권을 반환하는 협정 등 두 차례의 시나이 협정을 맺었다. 결국 1975년 6월 수에즈 운하의 선박 통행이 1967년 6일 전쟁 이래 8년 만에 재개됐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이집트로서는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은 조치였다. 총이 아닌 외교로 얻은 승리였다. 나세르의 이집트가 1973년 전쟁에서 군사력을 보여준 결과이기도 했다.
문제는 경제였다. 사다트는 수에즈 운하 재개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에 시달렸다. 결국 1977년 빵과 식료품을 비롯한 주요 생필품에 적용하던 보조금 철폐를 지시했다. 그러자 빈민을 중심으로 정부 조치에 항의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 '식량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171명이 숨지는 유혈사태를 겪었다. 민심은 흔들렸고 상황이 다급해졌다. 전쟁영웅 사다트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웅의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카이로에 있는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 추모관. 사진=위키피디아.

카이로에 있는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 추모관. 사진=위키피디아.

재정난에 유전 눈독 리비아 침공하기도

사다트는 이웃 리비아의 유전에 눈독을 들였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에 대응하기 위해 이집트 동부 전선에 배치했던 군대를 7월 16일에 서부 전선으로 돌렸다. 1977년 7월 21일 이집트 군은 리비아 유전을 점령하기 위해 서쪽 국경을 넘어 리비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비난 속에 결국 나흘만인 24일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국내 여론도 차가웠다. 이집트 땅인 시나이 반도를 점령 중인 이스라엘에 대응해야 할 군대를 빼서 서부 전선으로 돌린 사다트에 대한 비난 여론이 끓어올랐다.
사다트는 이런 상황 속에서 빼앗긴 영토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로부터 돌려받을 방법을 고심했다. 이런 절박한 상황이 사다트의 결단을 불렀다.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이었다.
이집트를 비롯해 1945년 결성된 아랍연맹의 회원국들은 1967년 8월 카르툼 정상회의에서 어느 회원국도 이스라엘과 단독으로 평화 협상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사다트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선언적인 약속이 아니라 당장 이집트 국민에, 이집트 정부에, 자신의 권력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이고 실효적인 성과였다.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왼쪽)이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왼쪽)이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국민 보호 위해 지구 끝까지” 연설 뒤 적진행

사다트는 1977년 11월 9일 의회 연설에서 “이집트의 소년과 병사, 장교를 죽거나 다치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다면 지구 끝까지 가겠다”며 “그들의 나라에 갈 준비가 돼 있고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에서 그들과 대화할 준비도 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스라엘로 갈 준비를 하자 외교장관 이스마일 파흐미는 동행을 거부했으며 사다트가 귀국하자 사임했다. 효과가 없을 것이란 게 이유였다.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민중의 적개심과 증오는 쉼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사다트는 카이로대 정치학 교수인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1922~2016년, 외교장관 재임 1977, 78~79년)를 외교장관 대행으로 임명하고 이스라엘 방문에 동행시켰다. 나중에 유엔사무총장(재임 1992~1996년)을 지내는 부트로스갈리는 콥트 기독교도이며 부인은 이집트 유대인이었다. 메시지는 명확했다. 서로 생각 차이를 좁혀 이스라엘과 평화를 이루고 이를 통해 이집트의 국익을 도모하라는 것이었다.
사다트는 의회에서 한 자신의 발언을 열흘 만에 실행에 옮겼다. 11월 19일 사다트와 부트로스갈리를 비롯한 일행이 항공 편으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까지 가는 데는 45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음은 멀었지만 지리적으로는 가까웠다. 사다트는 다음날인 11월 20일 크네세트에서 이스라엘 국회의원 앞에서 아랍어로 연설했다. 크네세트에서 연설한 첫 아랍 지도자였다. 유대 우파 정당인 리쿠드당의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1913~92년, 재임 1977~83년)가 앉아있었지만 사다트는 이스라엘 국민에게 직접 평화를 호소했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국민에게 “평화를 위해 싸울 수 있도록 여러분의 지도부를 격려해달라”고 열변을 토했다.

1978년 미국을 방문한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오른쪽)이 조 바이든 미국 연방상원의원(왼쪽)을 만나고 있다. 당시 초선 연방상원의원이던 바이든은 상원 법사위원장과 외교위원장, 부통령을 거쳐 현재 미국 민주당의 대선 후보다. 사진=위키피디아

1978년 미국을 방문한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오른쪽)이 조 바이든 미국 연방상원의원(왼쪽)을 만나고 있다. 당시 초선 연방상원의원이던 바이든은 상원 법사위원장과 외교위원장, 부통령을 거쳐 현재 미국 민주당의 대선 후보다. 사진=위키피디아

이스라엘 국회 연설서 거북한 말도 거침없이

사다트의 연설은 쾌도난마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기 거북해 할 거북한 말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재를 외면하는 정치적 구호는 전 세계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평화를 위해선 팔레스타인 문제의 공정하고 지속적인 해결 방안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평화는 다른 나라 영토의 점령과 양립할 수 없다며 1967년 6월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모든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다. 팔레스타인 몫인 동예루살렘의 반환도 언급했다. 종교적으로,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지극히 예민한 지역임에도 그는 서슴지 않고 이를 언급했다. 이 지역을 반환해야 아랍 국가들도 이스라엘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베긴 이스라엘 총리도 지지 않았다. 그는 답례 연설에서 “우리와 이웃 간의 영구적인 국경에 관한 우리의 입장은 대통령 각하와 다르다”는 것이 그의 일갈이었다. 둘 다 원칙을 강조했다. 용호상박이었다. 하지만 협상에서 둘은 원칙을 약간씩 양보해 합의를 이뤘다.
결국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해선 아무런 양보도 하지 않았고, 이집트도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원칙과 이익을 모두 주장하면 조만간 둘을 모두 잃게 된다”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떠올리게 하는 협상이었다.

1978년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비교적 편안한 차림으로 평화 협상에 나선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왼쪽). 사진=위키피디아

1978년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비교적 편안한 차림으로 평화 협상에 나선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왼쪽). 사진=위키피디아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노벨평화상 수상

사다트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와 1978년 9월 17일 미국의 캠프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12일간에 걸쳐 끈질기게 협상했다. 그 결과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맺고 이를 백악관에서 조인했다. 아랍 국가 중 이집트가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외교와 경제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합의했다. 이집트는 1967년 빼앗겼던 시나이 반도를 총 한 방 쏘지 않고 되찾았다. 시나이 반도는 코로나 사태 직전까지 스쿠버 다이빙과 종교 순례지로서 숱한 관광객을 불러들인 이집트의 관광 달러박스 역할을 했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 공로로 78년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두 나라는 1979년 워싱턴DC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협상을 중재해 1993년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냈다. 이스라엘의 점령지인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기로 합의한 협정이다. 이른바 2국가 체제다.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이스라엘을 승인하기로 했다. 이런 화해 분위기 속에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댄 요르단이 1994년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이런 외교 드라마는 한국의 성지 순례단이 이스라엘과 이집트 국경,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을 육로로 지날 수 있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2국가 체제는 실행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국제관계나 분쟁외교에서 협정과 실정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1981년 10월 10일에 열린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장례식. 사진=위키피디아

1981년 10월 10일에 열린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장례식. 사진=위키피디아

이스라엘과 평화에 불만 이슬람주의자에 암살  

하지만 사다트는 아랍연맹에서 제재를 당하는 등 아랍권에서 수모를 당했다. 국내에선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반발을 샀다. 결국 1981년 10월 6일 욤 키푸르 전쟁을 기념하는 열병식 도중 무슬림형제단 소속의 이슬람주의자 군인들의 공격을 받고 숨졌다. 평화협정과 목숨을 바꾼 셈이다.

이집트를 방문한 미군 해군 고위 간부가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묘비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미국 해군

이집트를 방문한 미군 해군 고위 간부가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묘비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미국 해군

10월 10일 열린 사다트의 장례식에는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등 전임 대통령 3명이 동시에 참석했다.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도 대규모 조문단을 이끌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집트 주요 인사와 중동권 지도자는 보이지 않았다. 오만, 수단 등에서만 조문을 왔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버림받는다'는 오랜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장례식이었다.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암살범이 재판을 받는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암살범이 재판을 받는 모습.사진=위키피디아

결단력 중요하고 바닥 민심도 다스려야 

사다트의 삶과 죽음은 평화협상 과정에서 비전을 가진 지도자와 바닥 민심의 온도 차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지도자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민심을 추스르지 않으면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사다트의 불행한 암살은 아랍권에 숨은 이슬람주의의 위험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의 암살과 연계된 이슬람주의 세력은 나중에 알카에다를 비롯한 테러 세력과도 연결됐다. 평화협정 노력의 그늘 속에 예상하지 못한 독버섯이 자란 셈이다.
사다트의 노력은 역사에 선명한 족적을 남겼다.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아무리 악화해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외교·경제적 관계는 끈끈하게 유지되고 있다. 서로 실익이 있기 때문이다.
사다트는 이집트 카이로의 군사박물관에 묻혔다. 1973년 10월 전쟁 또는 욤 키푸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시설이다. 북한이 일부 시설을 지었다. 그의 추모관이 함께 있다. 사다트는 잊혀가지만, 일단 군사력을 보여준 뒤 그 여세를 몰아 평화를 추구한 그의 업적은 여전히 빛난다. 국제사회는 그런 이집트를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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