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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이스라엘 평화 중재한 미국, 한반도 종전협정 끌어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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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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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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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아랍권의 아랍에미리트(UAE)와 바레인이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오랜 적대관계였던 양 진영 사이에 훈풍이 한창이다. 한반도에서도 미국 중재로 1953년의 정전협정을 종전협정이나 평화조약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 있다.

이집트, 79년 이스라엘과 첫 화해 #미국 중재로 평화협정·노벨평화상 #할 말 다해가며 장기협상 끝 수교 #사다트의 용기·결단 되새겨봐야

아랍권과 이스라엘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56년 수에즈 동란, 67년 ‘6일전쟁’, 73년 욤 키푸르 전쟁(아랍권에선 10월전쟁) 등 4차례의 중동 전쟁을 치르면서 다시없는 원수가 됐다. 숙적이었던 이스라엘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처음으로 평화협정을 맺은 나라는 이집트였다. 79년 양국 수교의 주역인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1918~81년, 재임 1970~81년)의 평화 노력을 반추하고 교훈을 새겨본다.

눈여겨볼 점은 사다트가 73년 중동전쟁에서 아랍권의 첫 승리를 이끈 군사 영웅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이집트는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기습해 67년 6일전쟁의 치욕을 씻었다. 6일전쟁 당시 이집트는 처절한 패배 끝에 시나이 반도를 잃었다.

1978년 미국 캠프데이비드 별장에서 평화협상 중인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카터 미국 대통령, 그리고 베긴 이스라엘 총리(왼쪽부터). [중앙포토]

1978년 미국 캠프데이비드 별장에서 평화협상 중인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카터 미국 대통령, 그리고 베긴 이스라엘 총리(왼쪽부터). [중앙포토]

사다트는 절치부심했다. 이스라엘의 약점을 찾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결국 73년 10월 6일 기습작전으로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로 진군했다. 이스라엘이 예비군 소집에 필요한 방송도 쉬는 유대 종교 휴일인 욤 키푸르(속죄일)에 벌어진 기습이다. 이집트군은 미리 준비한 소련제 대공·대전차 무기로 이스라엘이 우세를 누리던 항공·기갑 전력을 격파했다. 과거 승리에 취해 적을 무시하고 방심하다 허를 찔린 이스라엘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집트는 군사력과 외교전의 양동작전을 펼쳤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서방권을 압박했다. 이스라엘이 휴전을 요청하고 미국이 중재했으며 소련이 동의한 가운데 이집트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일단 총성은 멎었다. 이스라엘엔 절체절명의 위기였고, 이집트엔 명예회복의 전쟁이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일단 이처럼 강한 힘을 보여준 뒤 타격을 입은 이스라엘과 협상에 들어갔다. 이집트의 군사력을 자각한 이스라엘도 이에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우파정당인 리쿠드당의 메나헴 베긴 총리(1913~1992년, 재임 77~83년)는 모두 강경 매파였으나 힘만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배경에는 이집트의 경제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77년 이집트 정부가 재정난 속에 빵을 비롯한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을 폐지하자 폭동이 벌어져 171명이 숨졌다. 이를 겪은 사다트는 경제발전을 위해선 과감한 평화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사다트는 냉전의 양 축인 미국과 소련에 각각 경제지원과 평화중재를 요청했지만, 소련은 난색을 보였다. 당시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이를 ‘평화를 위한 투자’로 판단해 이집트에 경제·외교적 지원에 들어갔다.

1973년 10월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기습한 이집트 군이 부교를 건너 진격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3년 10월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기습한 이집트 군이 부교를 건너 진격하고 있다. [중앙포토]

사다트는 전쟁 4년 뒤인 77년 아랍권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했다. 이 자리에서 사다트는 아랍 최강국 이집트의 지도자다운 강단을 보여줬다. 그는 이스라엘의 총리나 국회의원이 아닌 국민에게 직접 평화를 호소했다. 이스라엘이 가장 거북해할 팔레스타인과 점령지 문제 해결을 대놓고 촉구했다. 평화에 목매지 않고 시종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대등한 관계 속에 할 말 다하면서 평화협상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결국 사다트는 78년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 중재로 캠프데이비드 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와 12일간 협상한 뒤 협정을 맺었다. 이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집트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시나이반도를 돌려받고 아랍권 최초로 이스라엘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78년 노벨평화상은 이들에게 돌아갔다. 사다트는 국익을 위해 아랍권의 비난과 외교적 수모를 감수했다.

하지만 문제는 국내의 이슬람주의자들이었다. 나라와 사회를 이슬람법(샤리아)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리주의자들은 군대에도 잠입했다. 이슬람주의자 군인들이 81년 10월 전쟁 기념일 퍼레이드에서 사다트를 암살했다.

81년 10월 10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사다트의 장례식에는 닉슨과 제럴드 포드, 그리고 카터 등 3명의 전직 미국 대통령이 찾아와 조문했다. 이스라엘도 메나헴 총리를 비롯한 대규모 조문단이 찾았다. 평화를 위한 그의 용기와 결단, 그리고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양국은 그 뒤 숱한 시련에도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양국 국민과 외국인 방문객들은 국경을 통해 두 나라를 자유롭게 오가고 있다.

평화협정 체결과 관계 정상화를 위해 사다트가 걸었던 길은 평화로 가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서로 생각이 다른 상대를 이해하고 설득하면서 때로는 맞받아치겠다는 결연한 자세도 필요하다. 희생을 마다치 않겠다는 마음가짐도 필수적이다. 여기에 더해 반대하는 민심을 달래고 국민과 소통하며 함께 길을 가는 소통의 자세도 요구된다. 사다트의 삶과 죽음은 평화가 이념·이상·구호가 아닌 치열한 투쟁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평화는 결국 냉엄한 현실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