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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부국 쿠웨이트 군주, 공동묘지 한뼘 무덤만 남기고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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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9일 미국에서 91세로 세상을 떠난 쿠웨이트의 에미르(이슬람 군주) 사바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가 30일 쿠웨이트 시티의 작은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AP통신을 비롯한 외신들이 보도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쿠웨이트는 2020년 예상치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만7891달러로 세계 8위인 세계적인 부자 산유국이다.

쿠웨이트의 에미르(이슬람 군주) 사바의 장례식 다음날인 10월 1일 그의 작은 무덤에 추모객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쿠웨이트의 에미르(이슬람 군주) 사바의 장례식 다음날인 10월 1일 그의 작은 무덤에 추모객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1929년생인 사바는 2006년 1월 에미르에 즉위해 14년 8개월간 재위했다. 알자지라 방송에 따르면 사바는 지난 7월 쿠웨이트에서 수술을 받은 뒤 미국 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의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오다 숨졌다. 로체스터는 세계적인 종합병원인 메이오 클리닉 소재지다. 공식 발표에서 상세한 병명이나 사망 원인은 밝히지 않았다. 공식 발표에 앞서 쿠웨이트 방송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쿠란 낭송을 내보냈다. 쿠웨이트 정부는 40일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쿠웨이트 군주 사바, 29일 미국서 별세 #30일 항공편 귀국 당일 공동묘지 안장 #친척만 참석한 검소한 이슬람 장례식 #이슬람 수니파 교리 따른 소박한 묘지 #권력·재산·지위·명성과 무관 장례풍속 #시아파는 성인묘지 거대·화려하게 꾸며 #이를 타락했다고 여기는 수니파와 충돌 #1802년 사우디,전쟁으로 시아 성지파괴 #사바, 40년 외교장관 맡아 화해의 인물 #기부 많아 카터, ‘인도주의 지도자’ 불러

2006년 즉위해 지난 9월 29일 미국에서 별세할 때까지 쿠웨이트를 통치한 에미르9이슬람 군주) 사바. AP=연합뉴스

2006년 즉위해 지난 9월 29일 미국에서 별세할 때까지 쿠웨이트를 통치한 에미르9이슬람 군주) 사바. AP=연합뉴스

친척만 참석한 장례식…들것에 실려 안장

눈에 띄는 것은 사바의 장례식과 무덤이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사바의 유해는 사망 다음날인 9월 30일 항공편으로 쿠웨이트로 옮겨져 당일 쿠웨이트 시티에 있는 술라이비카트 묘지에 안장됐다. 이슬람식 장례에선 사망한 지 24시간 안에 안장하는 것이 전통이다. 술라이비카트 묘지는 사바의 친척인 왕족들도 묻혀 있지만 일반인도 매장되는 공동묘지다.
이 공동묘지에는 사바의 형으로 전전임 에미르였던 자베르도 묻혀있다. 자베르는 1977년부터 2006년까지 에미르로 재위했으며, 1990년 이라크 침공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극복한 군주다. 그런데도 공동묘지에 소박하게 묻혔다. 사바도 그의 뒤를 따라 간소한 장례식을 마치고 작은 무덤에 누웠다.
아랍뉴스에 따르면 조용하고 간략했으며 검소한 장례식이었다. 이슬람 전통에 따라 유해는 평소 입던 차림 그대로 천에 쌌으며, 관은 따로 없었다. 유해는 철제 파이프로 만든 들것에 실려 묘지로 옮겨졌으며 매장 전에 시멘트 제다에 잠시 얹혀졌다. 이슬람 예식과 기도가 끝난 뒤 사바는 매장됐다. 장례식에는 친척만 참석했으며 군인들이 지원했다. 일반인의 묘지 방문은 다음 날인 10월 1일부터 허용됐다.

지난 9월 30일 쿠웨이트 시타에서 열린 에미르 사바의 장례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사바의 유해는 국기에 싸이고 들것에 담겨 바닥에 놓여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9월 30일 쿠웨이트 시타에서 열린 에미르 사바의 장례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사바의 유해는 국기에 싸이고 들것에 담겨 바닥에 놓여있다. AFP=연합뉴스

비석도 없이 얕은 흙에 덮인 작은 무덤  

AFP통신 등이 송고한 사진을 보면 세계 최고 부자나라의 에미르였던 사바의 무덤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작고 소박했다. 무덤에는 망자의 이름 표시만 있을 뿐 높은 봉분이나 다른 장식 또는 표식은 없었다. 공동묘지의 다른 무덤과 마찬가지로 봉분도 비석도 없는 평범한 무덤이었다. 장례 직후 지상에서 높이 30cm 정도로 흙이 일시 덮였을 뿐이다.
쿠웨이트 왕실을 비롯한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슬람 수니파는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금한다. 왕족도 예외가 아니다. 살아서 세속적인 권력이나 재산,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인 지위나 명성과 무관하게 장례식과 무덤은 똑같다. 매장한 다음에 가족이나 친척이 다시 찾아오는 일도 많지 않다. 죽음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종교적 가르침을 군주도 예외 없이 실천하는 것이다. BBC방송에 따르면 쿠웨이트 국민은 99.98%가 무슬림(이슬람 신자)이며 이 가운데 60~65%는 수니, 35~40%는 시아파로 추산된다.

쿠웨이트의 에미르(이슬람 군주) 사바의 장례식 다음날인 10월 1일 그의 작은 무덤에 경비병과 추모객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쿠웨이트의 에미르(이슬람 군주) 사바의 장례식 다음날인 10월 1일 그의 작은 무덤에 경비병과 추모객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수니파는 소박 무덤, 시아파는 화려한 성인 영묘

모든 무슬림(이슬람 신자)이 이런 장례식을 거쳐 작은 무덤에 묻히는 건 아니다. 종파별로 다르다. 이슬람 시아파는 종교적 성인이나 지도자의 무덤을 거대하게 짓고 화려하게 장식한다. 이는 시아파의 중요한 특징이다. 1979년 시아파 국가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주도하고 1989년 세상을 떠난 루홀라 호메이니는 테헤란에 건설된 장엄한 영묘에 잠들어 있다. 부인과 아들, 그리고 그를 따르던 정치인도 함께 묻혀 이란 이슬람 혁명의 종교적·정치적 성지 역할을 동시에 담당한다. 이 영묘는 3년에 걸쳐 건설됐으며 참배객이 그치지 않는다.
시아파의 성지인 이라크 남부 카르발라에는 시아파가 성인으로 받드는 이맘 후세인의 거대한 영묘 건물이 건설됐으며 그 가운데에 화려하게 장식된 후세인의 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시아파의 종교적인 성지다. 이라크 남부 나자프에는 시아파 성인인 이맘 알리의 영묘가 있어 순례객으로 붐빈다. 알리는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며, 후세인은 알리의 아들이다.
성지순례는 신앙고백, 기도, 단식(라마단달의 주간 단식), 기부와 함께 무슬림의 5대 종교의무의 하나다. 이들은 이슬람력의 마지막 달인 두알히자에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성지인 메카를 순례하는 ‘하지’와 일 년 중 원하는 때에 성지순례를 하는 ‘움라’를 한다. 그 중 시아파는 카르발라와 나자프를 비롯한 시아파 성지도 별도로 순례한다. 시아파 성지는 이라크 외에 이란에도 여러 곳이 있다.

이란 수도 테헤란에 있는 호메이니의 영묘. 3년에 걸쳐 건설됐다. 사진=위키피디아

이란 수도 테헤란에 있는 호메이니의 영묘. 3년에 걸쳐 건설됐다. 사진=위키피디아

시아파 호화 무덤, 수니파와 전쟁 부르기도

시아파의 화려한 무덤 전통은 수니파 세력과의 전쟁을 유발하기도 했다. 1802년 수니파 사우드 왕가가 지배하던 디리야 에미리트국은 카르발라를 공격해서 수니파 성지인 후세인의 영묘를 파괴하고 철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이뤄진 원정이었다. 사우드 왕실은 18세기 수니파 종교개혁가인 무함마드 이븐 압달 와하브가 쿠란에 적힌 대로 살아야 한다는 와하브파를 제창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보호자를 자청했다. 정치권력인 사우드 왕실과 종교세력인 와하브파가 결합한 것이다. 와하브파는 성인의 묘지를 화려하게 짓는 시아파를 타락하고 이슬람을 왜곡하는 세력으로 간주했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 압둘아지즈 이븐 압둘라흐만 알사우드(서구에서는 이븐 사우드로 부름)는 바로 이 사우드 왕실의 후예다. 사우디라아비아는 이슬람 수니파 중에서도 와하비즘을 추종한다.

이라크 나부 카르발라에 있는 시아파 성인 후세인의 영묘의 내부. 시아파의 성지다. 사진=위키피디아

이라크 나부 카르발라에 있는 시아파 성인 후세인의 영묘의 내부. 시아파의 성지다. 사진=위키피디아

쿠웨이트는 바레인과 함께 페르시아 만(아라비아 만) 지역 군주 국가 중 드물게 자국 국민의 기독교 신앙을 허용해 300~400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페르시아 만 지역의 다른 군주국가가 국민이 기독교를 믿으면 대개 국적을 박탈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종교적 관용 국가다.
쿠웨이트 인구는 2019년 추산 442만 명이다. 쿠웨이트 정부 통계에 따르면 이 가운데 국민은 30.36%에 불과하다. 인도아대륙(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스리랑카·네팔) 등 아시아 출신이  40.42%, 아랍국가 출신 27.29%, 아프리카 1.2%, 유럽 0.39% 등 외국 출신이 전체 주민의 70% 가까이 차지한다. 외국인의 종교는 아랍인이 이슬람 93.95%, 기독교 5.48%의 분포이며 아시아계는 이슬람 43.84%, 기독교 39.13%의 분포다. 쿠웨이트는 외국 출신 거주자는 물론 자국민의 종교도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한다.

오일 달러로 번영하는 쿠웨이트의 수도 쿠웨이트 시타의 모습. EPA=연합뉴스

오일 달러로 번영하는 쿠웨이트의 수도 쿠웨이트 시타의 모습. EPA=연합뉴스

사바, 외교와 인도주의 활동 추구한 기부왕

이번에 별세한 사바도 관용의 에미르로 불렸다. 그는 1963년부터 1991년까지, 1992년부터 200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모두 40년 가까이 외무장관을 맡았다. 사바는 1990년 이라크의 침공으로 전 국토가 유린 당했을 때 에미르였던 자베르와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이라크군을 몰아내자 왕족 가운데 가장 먼저 귀국해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그런데도 전쟁이 끝나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라크와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벌였다. 자국을 침공해 합병하려고 한 이라크에 맞설 경우 화근을 계속 남기게 될 것으로 보고 외교력을 총동원해 재발을 막으려고 애썼다. 노련한 외교장관으로서 작은 나라 쿠웨이트가 생존하는 법을 알았던 셈이다. 그것은 대화와 상호이해였다.

생전에 외교와 인도주의 기부활동으로 이름 높았던 쿠웨이트 에미르 사바가 사후에 공동묘지에 묻혔다. 지난 10월 1일 그의 무덤 주변에 추모객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생전에 외교와 인도주의 기부활동으로 이름 높았던 쿠웨이트 에미르 사바가 사후에 공동묘지에 묻혔다. 지난 10월 1일 그의 무덤 주변에 추모객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유엔에 따르면 사바는 에미르에 즉위한 뒤 석유로 번 돈의 상당액을 국제사회의 인도주의 구호활동에 기부했다. 특히 21세기 최대 인도주의적 재앙이라는 시리아 내전의 인도주의적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2013년 3억 달러, 2015년 5억 달러 등을 내놨다. 시리아 인도주의 위기에 대응하는 기부로는 최대 규모다. 인도주의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사바 에미르를 두고 “글로벌 인도주의 지도자”라고 불렀다. 유엔의 반기문 사무총장은 현역 시절 사바에게 인도주의 상을 수여했다.

쿠웨이트의 신임 에미르인 나와프. 2009년의 모습이다. 올해 83세다. AFP=연합뉴스

쿠웨이트의 신임 에미르인 나와프. 2009년의 모습이다. 올해 83세다. AFP=연합뉴스

91세 사바 이어 83세 나와프가 승계

사바는 에미르에 즉위하기에 앞서 2003년 7월부터 2006년 즉위 직전까지 총리를 맡았다. 1921년생으로 연로한 전전임 에미르인 자베르가 노환으로 활동을 못하자 총리로서 사실상 직무를 대신한 것이다. 하지만 자베르의 후임은 사촌인 사드가 맡게 됐다. 1930년생인 사드는 2006년 1월 15일 에미르에 올랐지만, 즉위 선서를 적은 문서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등 노환과 치매 증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서 에미르 자리는 사바에게 돌아왔다. 사바는 즉위하자마자 후계자로 동생인 나와프(1937년생)를 왕세제로 앉혔으며, 나와프는 83세의 나이로 형을 이어 에미르로 즉위했다. 고령 승계다.
사바는 걸프 지역 군주국 가운데 처음으로 여성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국가 현대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가족이 국가를 사실상 소유하는 군주제 아래에서 쿠웨이트가 21세기 현대국가로 발전하는 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보인다. 신임 에미르인 나와프가 어떤 새로운 변화를 끌어낼지 궁금한 이유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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