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덮으려 보수 대법관 지명한 그 행사, 트럼프 발목잡다

중앙일보

입력 2020.10.04 18:59

업데이트 2020.10.04 21:01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연방 대법관에 지명했다. 이날 지명 행사에는 150명 넘게 참석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해 8명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연방 대법관에 지명했다. 이날 지명 행사에는 150명 넘게 참석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해 8명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언제 어떤 경로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감염됐는지 추적 중인 백악관은 닷새 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연방대법관 지명식을 진원지로 지목하고 있다. 보수 성향 대법관 임명 강행이라는 이벤트로 보수층 결집을 노렸지만 결국 코로나19가 대통령과 측근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트럼프 코로나19 확진, 거슬러 올라가보니
대법관 지명식, 대선 TV 토론 진앙 의심
코로나 비판 덮는 호재 삼으려 성대하게
트럼프 포함 8명 확진…"앞으로 더 나올 것"
확진 후에도 보건당국 지침 제대로 안 따라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3일(현지시간) CNN에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집단 감염이 지난주 연방 대법관을 지명하는 로즈가든 행사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지난 26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8일 전 세상을 떠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 후임에 에이미 코니 배럿(48) 판사를 공식 지명하는 자리였다.

백악관 핵심 당국자, 행정부 장관, 상·하원 의원, 법조계 인사 등 150명 넘게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고, 악수하고, 껴안고 볼 키스를 나눴다. 의자도 촘촘하게 배열해 사회적 거리 두기는 실종됐다. CNN은 "마치 이곳은 코로나19가 오기 전, 딴 세상 같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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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사 참석자 가운데 3일까지 알려진 확진자만 8명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 켈리앤 콘웨이 전 선임고문이 양성 판정을 받았다.

상원 법사위 소속으로 배럿 지명자 인준 청문회를 끌고 나가야 할 공화당 톰 틸리스, 마이크 리 의원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와 존 젠킨슨 노터데임대 총장도 감염이 확인됐다. NYT 소속 등 출입기자 3명도 확진됐는데, 이 중 1명이 로즈가든 행사를 취재했다.

트럼프, 코로나19 확진 전후. 그개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트럼프, 코로나19 확진 전후. 그개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중 세 번째 대법관을 임명할 기회를 얻자 백악관은 이 행사를 성대하게 준비했다. 대선 어젠다를 코로나19 부실 대응 논란에서 보수 성향 대법관 임명으로 전환할 수 있는 호재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 재선 카드였던 경기 부양이 코로나19로 헝클어진 뒤 마땅한 대안이 없던 차에 연방 대법원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 진영 간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트럼프는 민주당의 반대에도 긴즈버그 대법관 후임 지명을 밀어붙이며 대법원 이념 지형을 보수 6, 진보 3으로 바꿀 수 있다는 보수층의 기대를 끌어올렸다.

뉴욕타임스는 지명식은 야외에서 진행됐지만, 행사 전후 열린 환담과 리셉션은 백악관 안 실내에서 열렸으며, 참석자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좁은 백악관 구조를 고려하면 밀착해서 대화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최측근이 아닌 일반 참석자들 확진 여부가 드러나면 감염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

트럼프 최측근인 호프 힉스 보좌관, 빌 스테피언 선대본부장, 로나맥대니얼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위원장도 확진됐다. 이들은 로즈가든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수시로 만났다. 론 존슨 공화당 상원의원도 로즈가든 행사와 무관하게 확진됐다.

켈리앤 콘웨이 전 백악관 고문과 윌러엄 바 법무장관이 지난달 26일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 지명식이 끝난뒤 대화하고 있다. 콘웨이는 엿새 뒤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AP=연합뉴스]

켈리앤 콘웨이 전 백악관 고문과 윌러엄 바 법무장관이 지난달 26일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 지명식이 끝난뒤 대화하고 있다. 콘웨이는 엿새 뒤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AP=연합뉴스]

로즈가든 대법관 지명식이 '슈퍼 전파 이벤트'가 됐다면 지난달 29일 열린 대선 후보 TV 토론은 트럼프 핵심 측근 감염 확산 매개체가 됐다. 토론 준비를 도운 크리스티 전 주지사는 "대통령과 토론을 준비하는 방 안에서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크리스티 전 주지사, 힉스 보좌관, 콘웨이 전 고문, 스테피언 본부장이 토론 준비에 참여했다.

토론 상대였던 민주당 대선 후보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2일 검사 결과 음성 판정을 받았고, 사회자 크리스 월리스는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바이든 측은 앞으로 검사 횟수를 확 늘리고, 결과가 나오는 대로 모두 공개하겠다고 밝혀 트럼프 대통령과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백악관 발 감염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마크 메도스 백악관 비서실장은 "이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백악관 직원 가운데 추가 감염자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행사 참석자들이 당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하고 언론 보도를 통해 확진 소식을 접하는 실정이어서 접촉자 추적 검사와 격리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트럼프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의 코로나19 감염은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다는 게 워싱턴 반응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마스크 쓰기, 집회 자제 등 보건당국 지침을 대놓고 무시하는 일이 하나둘 쌓이다가 이번 로즈가든 행사로 둑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하자 지난 3월 자택대기명령을 내린 뒤 5월 말까지는 자제하다가 6월부터 대중 유세 등 활동을 재개했다. 8월 말에는 백악관에서 공화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 후보 수락 연설을 하면서 손님 1500명을 초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사안일주의가 퍼졌다는 분석도 있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매일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있고, 트럼프에 가까이 가는 사람은 모두 검사를 받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밝혔지만, 검사는 예방책이 될 수 없을뿐더러 그마저도 점점 소홀하게 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확진 전 마지막 검사, 그리고 음성 판정을 받은 게 언제였는지 묻는 언론 질문에 백악관은 계속 답하지 않고 있다. 언젠가부터 코로나19 검사를 건너뛰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한 예로 대선 후보 TV 토론 진행을 맡은 크리스 월리스 폭스뉴스 앵커에 따르면 TV 토론 참석자는 검사를 받기로 돼 있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검사를 생략했다.

트럼프 대통령 확진으로 백악관 직원들 가운데 마스크 쓴 사람이 부쩍 늘었지만, 보건당국 지침은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 대통령과 업무상 밀접 접촉한 메도스 비서실장은 트럼프 확진 후에도 자가 격리하지 않고 평소처럼 일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확진을 발표한 2일 오전 메도스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기자들에게 대통령 건강 상태에 대해 브리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용 헬기 마린원을 타고 월터 리드 군 병원을 향했을 때도 동행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일 입원 중인 월터 리드 군 병원에서 4분짜리 동영상을 찍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곳에 들어올 때는 좋지 않았는데 상태가 나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일 입원 중인 월터 리드 군 병원에서 4분짜리 동영상을 찍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곳에 들어올 때는 좋지 않았는데 상태가 나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 질병통제센터(CDC)는 의료진과 돌보는 사람 외에는 확진자와 접촉하면 안 된다는 지침을 갖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입원 이틀째인 3일 병원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4분짜리 영상 메시지를 찍어 배포했다. 미 언론은 영상 촬영을 위한 스태프가 한 공간에 있었을 것이라며 여전히 무심한 백악관의 대응방식을 지적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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