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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리는 챠트

중앙일보

입력

의사들에게 챠트는 환자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 챠트는 환자를 볼 때 뿐 아니라, 임상기록을 토대로 논문을 작성할 때 필수입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어떤 특정 논문을 쓰기 위해서 이런 저런 챠트를 뽑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잊었던 환자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환자들에게는 입원 챠트와 외래 챠트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환자에게는 외래 챠트가 어느 날짜에서 끝이 나버린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 날부터 외래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젊은 환자인 경우나, 다른 의료기관으로 전원된 환자들은 별로 감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동안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노인들을
한 분 한 분 떠올리면서 그 챠트를 보고 있노라면 때론 눈앞이 흐려지기도 합니다.

특히 만성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지속적으로 약을 복용했던 환자들은 이미 개인적으로 가까워져서 더 이상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유난히 기억에 남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작은 가방을 늘 뒤에 메고 힘겹게 혼자 약을 타러 다니시던 할머니, 하얀 백발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내가 언제 죽겠느냐고 늘 걱정하시던 할아버지,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던 할머니....등등

챠트에 기록된 한 줄의 글에도 그 분들의 아픔이 절절이 배어있습니다. 그 분들은 이런 모든 아픔과 괴로움을 벗어났으니까 오히려 홀가분할까요?

살아생전 그렇게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시던 노인들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마지막 치료법은 오직 죽음뿐이 없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한 순간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그 고통의 끈을 놓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네 의학의 한계를 절감하여 때론 허탈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끙끙 머리를 쓰면서 아픔의 원인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그 분이 돌아가시면 그런 고민의 결과가 허탈해서 맥이 빠지는 것을 여러 번 겪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챠트를 펼칠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그리운 까닭은...
그 분들에게 정을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제게 상의하였던 그 분들이 한 분 한 분
제 곁에서 떠나실 때마다 저는 세월의 흐름을 절감합니다.
생각해 보면 오래 사신 분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이별이 아쉬운 까닭입니다.

그들이 평생에 가졌던 많은 경험과 성취, 인연도 죽음으로 인하여 같이 사라져 버림도 아쉽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자들의 아픔이 떠나는 자의 두려움보다 더 진하게 느껴짐은 나 역시 살아있는 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 시절 저의 할아버지께서 늘 때만 되면 당신의 묘자리를 보려고 가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그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묘를 보는 것이 좋으실까 하고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이제는 많은 분들을 보내드리면서 그들의 죽음을
배웅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루
하루
이별 연습을 하다가
언젠가는
언젠가는
나 역시
남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고
이별을 고하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절감을 합니다.

오늘도 빛 바랜 챠트를 들여다보면서
또 다른 이별을 예감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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