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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오지마라"한 할머니, 카메라 꺼지자 "그래도 올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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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거만 잘 있으면 된다. 올해는 오지 마라.”

언택트 시대 엷어지는 효 ②만남 감소, 소원해지는 부모·자식

경북 의성군에 혼자 사는 이분남(84) 할머니는 대구·울산에 나가 사는 자식들에게 최근 이런 내용의 영상편지를 보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의성군청의 영상편지 제작 요청에 응했다.

추석을 앞두고 도시의 자녀들에게 보낼 안부영상을 촬영 중인 어르신들. [사진 의성군]

추석을 앞두고 도시의 자녀들에게 보낼 안부영상을 촬영 중인 어르신들. [사진 의성군]

할머니의 속마음은 어떨까.
“내 마음은 마스크 단단하게 끼고서라도 (애들을) 보고 싶제.”

이 할머니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지난 5월 생일 때 애들을 본 뒤 그 이후로 못 봤다”며 “코로나 때문에 이번 추석에 아이들과 손자들 모두 못 보게 생겼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코로나 감염을 모두가 주의해야 하는 시기이니.나 혼자 그리 생각해선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병태(80) 할머니도 “나중에 오니라(오거라)”고 영상편지를 띄웠지만 마음 한구석엔 섭섭함이 있다고 했다. 그는 “마음은 자식들, 손자들 다 보고 싶다. 특히 교수를 하는 큰 손자가 가장 보고 싶다”고 말했다.
박경숙 의성군 노인복지계장은 “혼자 사는 어르신 1873명이 영상편지 보내기를 했다”며 “어르신들은 영상편지에서는 ‘오지 마라’ 하면서도 촬영이 끝나면 ‘그래도 올끼라’ 라고 말한다”고 귀띔했다.

충북 옥천군 노인장애인복지관도 영상편지를 만들었다. 홀로 지내야 하는 외로움보다 아들·며느리가 코로나19에 노출될까 염려하는 애틋한 마음이 묻어났다.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어르신도 있다. 원재순(69)씨는 “방학 때마다 시골에 놀러왔던 손주들도 학교도 못가고, 집에만 있어서 답할 것 같다”며 “식당 일을 하는 아들과 며느리가 영상 편지를 보고 코로나 사태를 잘 이겨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성현 사회복지사는 “오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어르신들 눈빛을 보면 보고싶은 간절한 마음을 느껴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추석을 앞둔 지난 28일 인천 하나요양원 입소자가 창문 밖으로 가족들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 인천 하나요양원

추석을 앞둔 지난 28일 인천 하나요양원 입소자가 창문 밖으로 가족들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 인천 하나요양원

코로나19가 9개월째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언택트(Untact·비대면)’ 추석을 맞았다. 귀성을 말리는 부모, 거의 사라진 역귀성, 자식을 못 봐 우울증세를 보이는 요양시설 노인….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면서 점점 엷어지는 부모·자식 관계가 코로나19로 인해 더 소원해진다. 전통적인 효(孝) 문화가 약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코로나 때문에 부모·자식이 못 만난다. 자식이 못 가거나 코로나 핑계로 안 간다. 부모와 자식 관계가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 전 장관은 "서양은 부모·자식 관계가 원래 멀어서 코로나19 영향이 덜하지만 우리는 전통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오다 세태가 달라지면서 조금씩 멀어져왔고, 이번에 코로나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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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을 앞두고 23일 오후 대전 대덕구 한국철도공사 대전차량사업소에서 직원들이 운행을 앞둔 열차를 소독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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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부모·자식 간의 만남이 크게 줄었다. 이제나저제나 만남을 고대했지만 민족 명절 추석마저 비껴가게 됐다. 28일 코레일에 따르면 추석 전날인 30일 KTX·새마을·무궁화호 등 하행선 열차의 좌석 예매율은 79.1%다. 올해는 코로나19 방지를 위해 창측 좌석(9만1238석)만 발매했는데 이 정도만 팔렸다. 전체 좌석 기준으로 보면 예매율은 40.6%다. 지난해 추석 전날(9월12일) 예매율(97.2%)보다 뚝 떨어졌다.

추석 전날 역귀성 상행선 좌석 예매율은 지난해 69.3%에서 올해 19.2%로 더 크게 떨어졌다. 보따리를 들고 상경하던 노부모의 모습이 사라지게 됐다. 코레일 관계자는 “상행선 열차 예매율이 저조한 것은 코로나19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경기도 아들 집에서 명절을 쇠던 김모(충남 서천군)씨는 이번 추석에는 올라가지 않기로 했다. 김씨는 “나도 아들 집에 가지 않고, 아들도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며 “애들이 보고싶지만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경남 창녕의 80대 할머니도 명절 때마다 천안의 아들 집으로 상경했으나 이번에는 가지 않는다.

온라인으로 추모·성묘할 수 있는 e하늘 장사정보시스템 사이트의 화면. [사진 행정안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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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B씨(87·여)는 “코로나19 때문에 (애들이) 못 온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오라고 말하느냐”며 “머리로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해하지만, 마음은 영 좋지 않다. 1년에 한 두번 명절 때 보는건데 내가 언제 죽을 줄 알고 (애들이) 이러는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인천 옹진군은 매년 명절마다 관내 귀성객을 대상으로 여객운임을 전액 지원했지만 이번 추석 땐 중단했다. 옹진군 관계자는 “옹진군은 고령인구가 많아 감염 확산시 위험성이 크고, 유일한 운송수단인 여객선 또한 감염 확산에 취약해 이렇게 결정했다”며 “외부인이 방문을 자제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CCTV 보살핌’도 등장했다. 서울에 혼자 사는 80대 A씨 집 거실에는 홈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다. 코로나19가 터지고 올 봄에 자식들이 자주 못오게 되자, 고령의 아버지가 걱정돼 달았다고 한다. A씨는 “자식 마음은 이해하지만 자주 보는 게 더 좋은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이번 추석에 홀로 보낸다. 홈 CCTV 업체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이후 노부모 집에 CCTV를 설치하려는 문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울산 울주군 삼남면에 위치한 이손요양병원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한 비접촉식 안심면회실이 설치돼 있다. 지난 7일 이손요양병원 안심면회실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환자와 보호자가 비닐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보며 대화하고 있다. 뉴스1

울산 울주군 삼남면에 위치한 이손요양병원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한 비접촉식 안심면회실이 설치돼 있다. 지난 7일 이손요양병원 안심면회실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환자와 보호자가 비닐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보며 대화하고 있다. 뉴스1

요양시설 노인들에게는 잔인한 추석이다. 인천 하나요양원 강순영(59) 대표는 “코로나19 이후 자녀 방문이 많이 끊겼다”며 “솔직히 말하면 코로나19 핑계 대고 안 오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유리 사이로 보거나, 멀리서 인사하거나 방법을 찾으면 많은데 적극적인 자녀가 별로 없다”며 “면회 금지가 길어져서 우울해하는 어르신들이 많다”고 전했다.

노부모 부양(돌봄) 인식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통계청의 사회조사에 따르면 노부모 부양 책임이 ‘가족·정부·사회에 있다’고 답한 사람이 2002년 18.2%에서 2018년 48.4%로 크게 늘었다. 반면 가족에 있다는 응답은 70.7%에서 26.7%로 줄었다. 전체 노인 중 독거노인 비율이 2000년 16%에서 2019년 19.5%로 올라간 것도 효 약화 풍조를 보여준다.

전남 완도군에 거주하는 어르신이 군청 공무원의 도움으로 딸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사진 완도군

전남 완도군에 거주하는 어르신이 군청 공무원의 도움으로 딸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사진 완도군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과거 가족 중심에서 지금은 개인의 삶을 중시하면서 한국 사회가 가족주의에서 빠르게 탈피하고 있다”며 “맞벌이가 늘고 경제·시간적 여유가 없어지면서 부모 부양 인식도 다른 국가에 비해 정부·사회 책임 쪽으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효 문화가 옅어지는 흐름 속에 코로나19가 가족관계를 더욱 단절시키는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라고 봤다. 다만 근본적으로 가족관계 변화를 가져올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코로나19는 서로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두는 것인만큼 마음이 멀어지는 건 아니다”며 “영상통화를 더 자주하며 가족 간 결속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석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가족관계가 느슨해지는 걸 방지하려면 정부가 코로나19에 맞는 돌봄 시스템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코로나19로 노인·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 시스템이 멈춘 지 오래됐다”며 “여기에 전 사회적으로 언택트만 강조해 가족 돌봄도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코로나19가 내년까지 간다면 비대면 정책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며 “사회적 돌봄이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가족 간 유대감도 변함없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대전=김방현·김윤호·최종권 기자, 백민정·채혜선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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