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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놀 만큼 놀아 본 러시아 귀족이 뒤늦게 빠진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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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34)

사랑은 진정 어떤 모습인가? 사랑했으나 외면당했기에 가슴 아프고, 사랑하기에 심장이 격해짐을 억누를 수 없으며, 사랑하면서도 떠날 수밖에 없음에 오열하는 러브스토리가 여기 있습니다.

1879년 차이콥스키가 발표한 ‘예브게니 오네긴’은 엇나간 운명과 뒤늦게 깨달은 사랑이 잔인하게 돌아서 버리는 내용의 오페라랍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러시아의 거장 차이콥스키가 푸시킨의 동명 운문소설을 토대로 작곡한 명작이지요. 그가 ‘음악으로 그려낸 장면’이라고 표현한 대로 당대 러시아의 생활상과 심리묘사를 뛰어난 음악적 필치로 그림처럼 표현하고 있답니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같이 인간의 삶을 처절하게 노래한 오페라지요. 그런 사연과 그의 멋진 시적 표현이 차이콥스키의 서정성 가득한 음악과 함께 심금을 울리기에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열렬한 관객의 사랑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답니다.

밤 새워 사랑의 열정으로 편지를 썼건만... [사진 Flickr]

밤 새워 사랑의 열정으로 편지를 썼건만... [사진 Flickr]

막이 오르면, 시골 마을에 당대 러시아의 최대 사교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미 놀 만큼 놀아보고 이제는 세상만사 권태로운 귀족 오네긴이 등장합니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을 보자마자 사랑의 열정이 불타오른답니다. 거칠게 밀려드는 마술 같은 힘에 그녀의 영혼이 타버릴 것 같다며 사랑을 노래하네요. 참으로 젊은 시절의 사랑이란, 그 뜨거움으로 순간을 모두 태워버리기도 하지요.

밤이 되고 타티아나는 편지를 씁니다. 그 남자를 만나기 전부터 자신의 영혼이 그에게 끌렸다며 하늘이 내려준 운명을 노래하는 타티아나. 젊고 순결한 가슴에 출렁이는 사랑은 은혜로운 것이지요. 늙고 무력해지는 황혼이 오면 사그라진 정열의 흔적이 서글프게 느껴지고요.

푸시킨 원작의 꽤 긴 편지내용을 차이콥스키는 타티아나의 아리아로 세밀하게 표현하지요. 음악은 섬세한 그녀의 독백을 세심하게 받쳐주는데, 벌써 새벽입니다. 그녀는 김 서린 새벽 창문에 손끝으로 ‘E’와 ‘O’를 소중하게 그려봅니다.

유모를 통해 편지를 보내지만 오네긴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정중하게 거절하며 따끔한 조언까지. 최고의 사교계를 이미 경험하고 세상에 냉소적인 그는 타티아나에게 진중한 처신을 권하지요. 그녀는 수치스러움과 고통을 호소합니다.

타티아나의 명명일(命名日)에 흥겨운 파티가 열리고, 남성들은 춤을 추며 사냥을 찬미하고 여성들은 그런 남정네들을 흉보고 있답니다.

올가와의 사랑이 영원할 것으로 믿었던 넨스키. [사진 Flickr]

올가와의 사랑이 영원할 것으로 믿었던 넨스키. [사진 Flickr]

오네긴도 참석했는데 주변에서 자신에게 무례하다는 둥 쑥덕거리자 빈정상하지요. 공연히 자신을 파티에 초대한 렌스키에게 화풀이를 하는데, 조금 전에 렌스키가 청한 춤을 사양한 그의 연인 올가에게 다가가 춤을 추며 은밀한 귓속말을 합니다. 감성적인 렌스키는 질투심에 불타 올가에게 항의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해버립니다. 저런, 그의 사랑이 상처를 입었네요.

잠시 숨을 고르듯 프랑스 시인 트리케가 등장하여 오늘의 주인공인 타티아나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축시 아리아 ‘그녀의 아름다운 미덕을’을 부르는데, 짧지만 아름다운 노래랍니다.

단 두 사람, 오네긴과 렌스키는 심각하군요. 올가와 별 관계가 아니라는 오네긴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미 상심한 렌스키는 충동적으로 결투를 신청하고 마네요. 그제야 오네긴과 올가는 경솔했던 처신을 후회하지만, 결국 오네긴이 결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렌스키, 아~ 고집스럽고 충동적인 젊음이여!

무겁지만 서정적인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이른 아침에 렌스키가 결투장에서 상대를 기다립니다. 그는 죽음을 예감한 듯, 아리아 ‘내 젊은 날, 어디로 가버렸는가’를 부르며 아름다웠던 추억을 그리면서 올가에 대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는 올가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다가 죽었음을 알아주리라며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올가는 렌스키가 결투에서 죽자 오래지 않아 결혼했답니다. 괜한 자존심은 접고 대결을 미룰 수는 없었는가, 렌스키여!

세월이 얼마간 흐르고, 그레민 공작이 주최한 파티에 결투 후 외국을 방황하다가 돌아온 오네긴도 참석했습니다. 공작은 아리아 ‘사랑 앞에 나이는 차별 없지’를 부르며, 자신의 사랑을 되살려낸 젊은 부인에게 무한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공작이 오네긴에게 부인을 소개하자 그는 깜짝 놀랍니다. 고귀한 공작부인이, 촌구석에서 만났고 자신이 어설픈 사랑을 훈계한 타티아나라니! 그녀를 다시 본 오네긴, 이제 그가 사랑의 열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뜨거운 사랑의 편지를 씁니다. 답장이 없지만, 두 번 세 번….

타티아나 역시 그를 다시 만나자 마음속 깊은 요동을 느낍니다. 마치 다시 소녀가 된 듯, 온몸의 연애 세포가 되살아나지요. 그때 오네긴이 찾아오고 다시 마주한 그들은 이제 역전된 상황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털어놓습니다. 어찌 보면 타타니아에게는 통쾌한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타티아나는 다시 흔들립니다.

두 사람은 애정을 확인하고 포옹합니다. 허나 오네긴의 눈물 고백에도 불구하고 타타니아는 결혼한 몸. 자신의 운명을 돌이킬 수는 없지요. 그녀는 공작부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명예를 택하고 오네긴은 잔인한 운명에 오열하며 막이 내려집니다.

원작인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은 모두 8장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그중 마지막 8장의 처음 발문에 “그대여, 안녕 만일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라면 영원히 안녕. – 바이런”이라고 표기해 놓았습니다. 사랑하면서 영원한 이별을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은 어떨지 차마 헤아릴 수 없군요.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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