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사랑하는 여인의 가슴에 칼 꽂은 순정남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33)

비제의 불후 명작인 ‘카르멘’은 고고학자인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작곡해 1875년 발표됐습니다.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집시여인과 지극한 사랑을 갈구하는 순정남의 뜨거우면서도 담배 연기처럼 매운 치정 비극을 다룬 오페라랍니다. 오페라의 일부 선율은 모 유산균 음료 회사의 광고음악 등 TV와 라디오의 배경음악으로 많이 쓰이고 있어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기도 하지요.

베로나 원형극장의 ‘카르멘’공연. [사진 flickr]

베로나 원형극장의 ‘카르멘’공연. [사진 flickr]

자유로운 사랑을 노래하는 집시여인 카르멘과 남녀 간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말아야 한다고 믿는 양반집 도련님 같은 순정남 돈 호세와의 사랑, 느낌이 어떠신가요? 이들의 사랑이 잘 될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다고 우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화려하고 강렬한 전주곡으로 시작합니다. 비극을 암시하면서요. 오렌지 가로수 나무 위로 햇빛 찬란한 도시 세비야를 무대로 아름다운 음악에 빠져 보시지요.

막이 오르면 담배공장 앞 광장에 군인들이 한가로이 담배를 태우며 쉬고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전경들이 시위가 없을 때 잔디광장에 앉아 시간을 때우던 것과 비슷한 풍경이지요. 휴식시간에 담배공장 여공들이 광장으로 나오지만, 많은 남자가 기다리는 것은 카르멘입니다. 남자들이 그녀에게 달려가 손을 내밀며 한 번만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구애하지요. 그녀가 아리아 ‘하바네라’를 부르는데, 낯선 군인 하나가 자기 일만 열심히 하고 있네요. 이런 남자가 맘에 들었는지, 아니면 약이 올랐는지 노래를 마친 카르멘은 꽃을 호세에게 던져줍니다.

이 아리아는 음악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주인공 카르멘의 인생관 특히 사랑에 대한 신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랑은 들에 사는 새, 아무도 길들일 수 없어요
거절하기로 마음 먹으면 아무리 해도 안되지요
협박을 해도, 꾀어도 안되지요…
당신이 잡았다고 생각한 새는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 버리죠
사랑이 멀리 있으면 기다려요
그러면 생각지 않을 때에 찾아올 테니까…

어떠세요? 카르멘은 당차고 주도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요! 집시여자에게 관심 없는 호세는 자신에게 꽃을 던지는 카르멘의 행동이 불쾌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불쾌한 마음 한구석이 이미 꽃향기에 살~짝 취한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나요.

갑자기 담배공장에서 소란이 일어나는데, 카르멘이 동료와 시비가 붙어 상해를 입혔답니다. 붙잡힌 그녀는 호세에게 도망치게 해달라며 유혹하고 결국 치명적인 매력에 홀린 그는 카르멘을 놓아줍니다. 범인을 놓친 그는 영창처분을 받지요. 시간이 흐르고, 집시의 술집에서 강한 남자의 상징인 투우사 에스까미요가 등장해 아리아 ‘투우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카르멘도 그의 구애를 받고 흔들리지만 외면합니다. 자신 때문에 영창에 간 호세가 오늘 출소하는 날이기 때문이지요. 드디어 호세가 왔습니다. 카르멘은 오직 그만을 위해 춤을 춥니다. 호세도 감옥에서의 고생을 보상받은 듯 그녀의 환영이 기쁘기만 하구요. 그때 군대 점호 나팔이 울리자 호세가 복귀하려 합니다. 탈영처리 되면 어머니와 약속한 명예회복은 영영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허나 그 말을 들은 카르멘은 이런 호세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를 위해 온몸으로 춤을 추고 있는데, 사랑을 미처 나누지도 못한 채 돌아가겠다니…. 카르멘은 당장 꺼지라고 소리칩니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명예를 회복해야 하는 호세는 카르멘과 헤어질 작정을 하고 귀대하려 합니다. 허나, 술 취한 중대장과 싸우는 바람에 부대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어버렸네요. 아~ 운명이란! 결국 산속 밀수꾼 야영지에서 호세가 카르멘과 함께 사랑하며 지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밀수 등 불법행위도 익숙해졌건만, 고향과 어머니를 생각하면 후회막급이지요. 그사이 열정이 식은 카르멘은 그런 호세에게 떠나려고 하는 중입니다. 본디 카르멘의 사랑은 날아다니는 새와 같으니까요.

야밤에 야영지에 투우사가 카르멘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왔습니다. 그녀를 투우시합에 초대하지요. 이 깊은 산속에 겁도 없이 호세의 고향 처녀 미카엘라도 찾아와 같이 고향으로 가자고 애원합니다. 그녀와 같이 떠나버리라는 카르멘에게 호세는 가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지요. 자신이 떠나면 카르멘이 에스까미요에게 갈 것을 질투하는 겁니다. 어머니가 위독하단 말에 어쩔 수 없이 호세는 “꼭 다시 돌아오마”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호세의 사랑 집착과 카르멘의 냉정한 외면.[사진 flickr]

호세의 사랑 집착과 카르멘의 냉정한 외면.[사진 flickr]

드디어 투우장 앞 광장에 투우사와 카르멘이 사랑을 노래하며 함께 등장합니다. 카르멘은 그에게 “당신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 없었다”며 애정을 표현하지요. 투우가 시작되고, 카르멘은 호세와 광장에서 서로 맞섭니다. 사랑을 갈구하고 카르멘에게 집착하는 호세의 울부짖음과 새로운 사내를 사랑하는 자유인 카르멘의 냉정한 외면이 치열하게 오고 갑니다. 카르멘이 호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소리치며 호세가 준 반지를 내던지고 투우장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성을 잃은 호세가 그녀의 가슴을 푹~찌릅니다. 투우장 안에는 투우사의 승리에 열광하는 환호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광장에서는 카르멘의 자유로운 사랑을 찌른 것이지요. 환호도 절규도 삼켜 버리는 비극의 현장. 담배 연기처럼 매운 이 사랑도 막을 내렸습니다.

지금 같으면 데이트 폭력에 불과한 이들의 매운 사랑 이야기에 우리는 왜 깊은 감동을 하며 환호할까요? 우리의 원초적 욕망과 죽음 앞에서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와 사랑을 추구한 이야기여서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 모든 감동을 선사해 주는 작곡가 비제의 찬란하고 극적인 음악에 모든 경의를 표합니다.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