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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나이가 들수록 이성친구가 큰 힘이 된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59)

해마다 이맘때면 시골살이 부업 중에 고추 꼭지 따는 일이 있다. 띄엄띄엄 앉아서 하는 일이라 코로나 걱정 안 해도 되니 다행이다. 서로 취업(?)하려고 하는 이유는 말동무가 있기 때문이다. [사진 pxhere]

해마다 이맘때면 시골살이 부업 중에 고추 꼭지 따는 일이 있다. 띄엄띄엄 앉아서 하는 일이라 코로나 걱정 안 해도 되니 다행이다. 서로 취업(?)하려고 하는 이유는 말동무가 있기 때문이다. [사진 pxhere]

코로나 사태로 마을회관이 다시 닫혔다. 모여서 말동무하기도 힘들다. 집안에만 계시던 몸이 불편한 어르신은 세월에 장사 없다고 움직이질 않고 있다가 한 분 한 분 요양원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제 동네에 남은 구순 넘는 어른은 세 분뿐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 걸어 다니니 그나마 다행이다. 자녀들은 걱정되는지 사람도 못 만나게 하고 밭일도 못 하게 한다. 이래저래 답답한 어르신들을 작은 일거리를 만들어 우리 집으로 집합시킨다. 해뜨기 바쁘게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손님이 왔다고 알린다.

해마다 이맘때 시골살이 부업 중 고추 꼭지 따는 일이 있다. 띄엄띄엄 앉아서 하는 일이라 코로나 걱정 안 해도 되니 다행이다. 어르신도 좋아하신다. 전문으로 하는 곳에서는 한 근을 따면 400원의 노임을 주는데 보통 한 사람이 너덧 시간에 30근 정도 딴다. 종일 쪼그려 앉아 만원을 벌지만 서로 취업(?)하려고 하는 이유는 말동무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몇 년째 그 일을 만들어 며칠 동안 동네 어른을 부른다. 돈을 드리려고 하면 이웃 간에 그러는 거 아니라며 섭섭해하기 때문에 적당한 양을 두 시간 정도 함께 하고 점심을 대접해드린다.

고추를 데크에 펼쳐 놓았다. 네 사람이 아무리 천천히 따도 시작한지 두 시간만에 끝날 판이다. ‘우쨌든 천천히 느리게 막걸리 드셔가며 점심시간까지 끌어야 한다’는 이상한 엄포를 놓는다. 어르신들은 서로 마주 보며 “알았지? 천천히 천천히…” 하며 호호 웃으신다. 허리는 굽고 걸음은 느리지만 손은 얼마나 빠른지 아무리 천천히 하려 해도 저절로 빨라지고 그만큼 살아온 이야기도 세월 깊이 들어간다.

쌍둥이를 두 번이나 나았지만 산후조리는커녕 미역국도 못 먹어 배 곪으며 자란 애잔한 자식 이야기,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고 곧 남편이 병으로 떠나 초근목피로 살아온 이야기, 열 가족이 넘는 가난한 대식구의 밥상을 준비하며 때마다 울던 이야기, 가족을 끌어안고 가난과 배고픔을 이겨낸 위대한 어른의 이야기는 소설보다 더 진하다.

인생을 다 알아버린 나이에 순수한 열정을 부러워하고 축하해 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어른이고,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 하루는 성공한 하루다. [사진 pixnio]

인생을 다 알아버린 나이에 순수한 열정을 부러워하고 축하해 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어른이고,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 하루는 성공한 하루다. [사진 pixnio]

오늘의 집중 이슈는 이웃 동네 어르신의 남자 친구 이야기다. 부모님의 엄격한 감시에도 이불 속에 발 밀어 넣고 모여 소곤소곤 수다 떨던 처녀 시절 같이, 코로나의 삼엄한 외출금지를 피해 해 질 무렵이면 이야기꽃 피우러 가끔 마실 나가신다. 남친이 생긴 어르신은 매번 귀가할 때 날 데리러 와줄 수 있냐고 친구에게 전화한단다. 모두들 귀를 쫑긋하고 친구의 휴대폰 가까이 귀를 갖다 댄다.

“밤길 위험하니 거기 가만히 있어요. 지금 곧 갈 테니 알았지요?”
아기 다루듯 하던 그 고즈넉한 음성을 기억하며 그날의 일을 뒷담화 한다.
“얼마나 좋을까?”
“알콩달콩 얼마나 좋았을까?“
“주절주절 이야기하며 함께 걸으니 얼마나 행복하겠노?”

노년엔 이성 친구가 큰 힘이 된다 말씀하신 김형석 교수의 강의가 생각난다. 인생을 다 알아버린 나이에 순수한 열정을 부러워하고 축하해 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어른이고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 하루는 성공한 하루다.

안동찜닭으로 점심을 배달시켜놓고 기분전환을 위해 젊은(?) 두 남자를 불렀다. 어르신의 리더로 새로 뽑힌 마을 토박이 70대 노인회장님과 부회장님이다. 사랑과 포용으로 어르신들의 멋진 친구가 되어 주는 두 분이 나타나니 모두 손뼉을 치며 반긴다.

집 앞 강가 풀숲에서 사람 소리에 놀란 꿩이 푸드덕 날아오른다. “옛날엔 저기 날아다니는 꿩들 모두 배고픈 우리 양식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부회장이 닭을 드시며 한 말씀 하신다. “꿩 대신 닭이로구나.” 남자친구 대신 와준 두 분을 보며 할머니도 한마디 하시니 어른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렇게 동상이몽 하며 실컷 웃다가 바나나 막걸리 한 병씩 선물로 들고 자리를 뜨셨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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