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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나라에선 안 쓰겠다" '연탄재 시인' 8년만에 돌아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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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새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를 펴낸 안도현 시인을 22일 온라인 기자간담회로 만났다. [사진 창비]

25일 새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를 펴낸 안도현 시인을 22일 온라인 기자간담회로 만났다. [사진 창비]

“첫 시집을 내는 것처럼 두근거립니다.”

2013년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절필선언을 했던 ‘연탄재 시인’ 안도현(59‧단국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이 새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를 냈다. 박 전 대통령 탄핵과 함께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한 지 4년째, 시집으론 『북항』(문학동네) 이후 8년 만의 열한 번째 시집이다.

‘연탄재 시인’ 안도현 8년 만의 시집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절필 철회

정식 출간 사흘 전인 22일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절필한 게 독립운동 같은 게 아니고 그 4년 동안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됐다”며 웃었다. “20대 땐 불의한 권력에 시(詩)로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시를 포기함으로써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자세를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몇 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때. 그게 해소가 되고서 처음 시를 발표할 때 ‘야, 괜히 혼자 오기 부린 것 아냐?’ 생각되기도 하고, 뭔가 달라진 것도 보여줘야 하는데 부담감이 굉장히 많았다”고 돌이켰다.

30년 넘게 시 써보니 “작은 것의 가치” 

안도현 새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창비]

안도현 새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창비]

그는 20대 초반 등단해 문학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서정시인으로 사랑받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적은 시 ‘너에게 묻는다’, 20년간 100만부 이상 팔린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 등이 유명하다. 2012년 대선 땐 문재인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 정치‧사회 문제에도 활발히 목소리를 내 2016년 폭로된 청와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1980년대에 20대를 보내면서 시 쓰는 제 머릿속엔 늘 민주화, 통일, 노동해방 이런 개념이 너무 많았다”는 그가 이번 시집에선 그런 “커다란 것들”은 싹 걷어냈다. “살아보니까 작은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 좀 더 작고 느린 것의 가치를 시로 써보는 게 중요하더라”면서다. 시인으로 30년 넘게 살며 배운 것이란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

시인의 말에서 “갈수록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누군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고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 말하는 사람일 뿐”이라 자신을 낮춘 그는 소박한 시골살이, 고모‧어머니 등 가족들의 평범한 생애에서 꾸밈없는 시어를 길어 올렸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도 엿보인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이는 그가 2017년 시작(詩作)을 재개하며 쓴 시 ‘그릇’ 일부다.

안도현 시인(오른쪽)의 시집 출간 기념 온라인 기자간담회가 22일 열렸다. [사진 창비]

안도현 시인(오른쪽)의 시집 출간 기념 온라인 기자간담회가 22일 열렸다. [사진 창비]

시집 제목은 자연에 영감을 받아 엮은 짧은 시 연작 ‘식물도감’ 한 구절을 따왔다. “변산반도의 한 펜션에 갔는데 능소화가 이층 창가까지 올라와 바다를 향해 꽃을 피운 모양이 마치 작은 악기 하나를 창가에 걸어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서 “식물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식물이 사람 못지않다. 사람보다 시간도 더 빨리 알아채고 미래도 더 빨리 예측하고 영혼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삶의 환경 바뀌면 시도 바뀐다

“삶의 환경이 바뀌면 어쩔 수 없이 시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아파트 같은 높은 데 살다 땅에 발을 딛고 살게 되어서 마음은 편합니다.” 올2월 그는 나고 자란 고향 경북 예천에 새로 집을 짓고 정착했다. 전북 원광대에 진학한 이래 전주에서 40년간 산 그다. “보통 경상도 출신은 서울로 대학 가서 직장생활 하는데 저는 수직 아니라 옆으로, 운 좋게 전라도에서 살았다. 전라도란 지역이 가진 역사성에 주목해서 시를 쓰면서 세계관이랄까 역사관이랄까 전라도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되짚었다.

유년기 노닐던 내성천 강변 마을로 돌아간 지금은 “시 쓰는 일이 몸 움직이기보다 훨씬 쉽더라. 야, 나는 손이 하얀 서생이구나” 하며 돌담 쌓고 나무 심고 꽃밭‧텃밭 일구며 지낸다고 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드넓은 은모래 백사장이 4대강 사업의 하나로 상류에 영주댐이 만들어지면서 풀과 나무가 무성한 곳이 되고 말았다” 한탄도 했다. 요즘은 “경제적‧문화적으로 소외된” 고향 예천을 알리려 ‘예천산천’이란 계간잡지를 내고 고등학교 문예반에 나가 “세상을 보는 밝은 눈”을 가르치곤 한다고 했다.

오래 살아온 분들의 삶 자체가 시죠

“갈수록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매료된다”는 그는 “비(非)시적인 것을 시로 만드는 일을 앞으로도 해보고 싶다”고도 밝혔다. “저희 어머니가 80 넘으셨는데 칠순 때 형제끼리 어머니 살아오신 길을 최대한 기록해보니 이 속에 시적인 게 들어있었다. 보통 지어내고 꾸며내고 만들어내는 게 시라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 오래 살아온 분들의 삶 자체가 시가 아닐까”라면서다.

안도현 시인은 "비시적인 것을 시로 만드는 일을 앞으로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사진 창비]

안도현 시인은 "비시적인 것을 시로 만드는 일을 앞으로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사진 창비]

지금의 마음가짐으로 20대로 되돌아간다면 그때와 다른 시를 쓰게 될까. “돌아갔을 때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전두환이라면 똑같은 방식으로 20대를 살아야 되겠죠. 그렇지만 그런 악순환은 되풀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고요.”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이야기를 이었다. “세상이 태평성대라면 시인들은 별로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다들 잘 먹고 잘살고 부유하고 풍요로운데 시가 뭐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면서 ‘겸손’을 강조했다. “요즘 속에 많이 들어오는 말 중의 하나가 ‘겸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동식물 만날 때도 좀 더 겸손하게 봐야겠다는 거예요. 강이나 바다 앞에서도 인간으로서 겸손하게 대해야겠다, 생각 많이 하거든요. 위축된 건 아니고요. 좀 더 겸손하게 그렇게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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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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