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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사도 집 못 들어가는 기막힌 상황…졸속 임대차3법 풍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0일 청와대 국민청원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

10일 청와대 국민청원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

“집을 팔아서 빚을 갚아야 하는데 중간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매매계약서 쓴 다음날 갑자기 임차인(세입자)은 계약갱신을 요구하고, 새로 집 산 사람은 실거주하겠다고 세입자를 내보내라고 하네요.”

지난 10일 청와대 국민청원 인터넷 게시판에 ‘임대차 보호법 왜 나는 보호받지 못하나요?’라는 제목의 청원으로 올라온 글 중 일부다. 1주택자인 청원인은 사업이 어려워 집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야 하는데 계약갱신청구권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는 “세입자는 나갈 수 없다고 하고, 매수자는 전세 만료날에 맞춰 실거주하겠다고 통보해왔다”며 “돈이 급한데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7월 말 임대차3법이 시행하면서 전세 낀 주택을 둘러싼 집주인, 세입자, 새 집주인간의 삼자간 분쟁이 늘고 있다. 이에 대해 국토부는 11일 설명 자료를 통해 “(새 집주인의) 실거주를 이유로 갱신거절이 가능한지는 세입자의 계약갱신요구 당시의 임대인을 기준으로 판단하다”고 밝혔다.

임대차법이 개정, 시행되면서 전세를 둘러싼 분쟁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사진 pikist]

임대차법이 개정, 시행되면서 전세를 둘러싼 분쟁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사진 pikist]

전세 끼고 집 샀다 낭패 볼수도

쉽게 설명하면 세입자가 계약 만료 전 계약갱신을 요구할 때 집주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는 ‘계약만료 6개월 전부터 1개월전’으로 규정돼 있다.

집주인이 바뀌기 전에 세입자가 계약갱신을 이미 요청했다면 새 집주인은 주택을 사더라도 실거주를 할 수 없다. 반대로 새로운 집주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후, 세입자가 계약갱신을 요구한다면 실거주 이유로 계약갱신을 거절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새 집주인은 계약 이후 잔금 등을 치른 후 소유권 이전등기까지 끝내야 임대인의 자격을 갖는다.

청원인 사례 역시 새 집주인이 소유권 이전등기를 끝내지 못했다면 세입자의 계약갱신을 거절할 수 없다. 국토부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봐야겠지만, 세입자가 계약 만료일에 퇴거하기로 합의해서 계약서를 썼다면 (임대인에게) 정당한 갱신거절 사유가 있다고 판단할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복잡해진 임대차3법은 시장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최근 전세 낀 매물 거래가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개포동 공인중개업체 대표는 “요즘 전세 낀 매물은 가격을 낮춰도 나가지 않는다”며 “자칫 샀다가 최대 4년 이상은 입주를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다”고 말했다.

김현미 장관 "4년 전세 전제로 집 사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11일 국회에서 열린 국토위 전체회의에 출석, 박선호 차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임현동 기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11일 국회에서 열린 국토위 전체회의에 출석, 박선호 차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임현동 기자.

그러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11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제는 임차인이 살수 있는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늘어났다는 걸 전제로 세입자가 있는 집에 매매 거래가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법에는 집 소유주와 임차인밖에 규정돼 있지 않다”며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기 전인) 다음 집주인은 법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임대차법 개정으로 애꿎은 피해를 보게 된 경우에 대한 보완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김 장관은 분쟁조정위원회 활용을 언급했지만, 구속력이 없어 소송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김은혜 국민의힘 의원은 “집 없는 서민이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소송에 매달려야 하나. 이게 정부가 해야 할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권대중 명지대부동산대학원 교수는 “전세 낀 매물이 논란이 되는 것은 한국 주택시장만의 특성인 전세 때문”이라며 “임대차 3법을 성급하게 처리하다 보니 제대로 된 논의가 부족해 생기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임대차 3법은 축조 심의(법 조문을 한 줄씩 읽어가며 문제점을 점검하는 방식) 없이 속전속결로 개정됐고, 이 가운데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 상한제는 개정 다음날(7월31일) 바로 시행됐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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