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아내 명의 무단으로 빌려 쓴 사업자금 누가 갚나?

중앙일보

입력 2020.09.05 08:00

[더,오래] 정세형의 무전무죄(33) 

일 처리를 본인이 직접 하면 관련 분쟁이 생겼을 때 본인이 책임을 지면 되지만,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경우에는 과연 본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사진 pxhere]

일 처리를 본인이 직접 하면 관련 분쟁이 생겼을 때 본인이 책임을 지면 되지만,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경우에는 과연 본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사진 pxhere]

일상생활에서 누군가가 본인을 대신해 계약을 맺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아파트의 소유주는 자녀인데 부모가 계약서 작성을 비롯한 계약 과정 전반을 처리한다거나, 아니면 부부 중 한 사람이 다른 배우자를 대신해 일을 처리하는 등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신 법률행위를 하는 게 그 예다. 일 처리를 본인이 직접 하면 그 일과 관련된 분쟁이 생겼을 때 본인이 책임을 지면 되지만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경우에는 과연 본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법률적으로는 실제 행위를 한 사람의 ‘대리권’을 인정할 수 있는지의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법률행위를 한 사람이 정상적인 대리권을 가지고 있다면 법률행위의 효과가 본인에게도 미치게 된다는 점은 당연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대리권이 없는 사람이 대리행위를 했다며 무조건 본인에게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하면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대리권이 없는 사람의 대리행위라 하더라도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본인에게 효력이 생기기도 한다. 법률용어로는 이러한 경우를 ‘표현대리(表現代理)’라고 한다.

민법에서 규정하는 표현대리의 종류는 3가지다. ① 본인이 대리권을 준다는 표시를 한 경우, ② 대리권의 범위를 넘어 대리행위를 한 경우, ③ 대리권이 소멸한 뒤에 대리행위를 한 경우다. 이번 글에서는 위 표현대리 중 주로 문제 되는 ①과 ②의 표현대리에 대해 살펴본다.

우선 민법 제125조에서 규정하는 대리권 수여의 표시에 의한 표현대리는 말 그대로 본인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대리권을 주었다고 제3자에게 알리고, 그렇게 표시된 대리권의 범위 내에서 대리행위가 이뤄졌다면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대리권을 수여한다는 표시’가 있었느냐가 중요하다.

대법원은 본인에 의한 대리권 수여의 표시는 반드시 대리권 또는 대리인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통념상 대리권을 짐작할 수 있는 직함이나 명칭 등의 사용을 승낙 또는 묵인한 경우에도 대리권 수여의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호텔 등의 시설이용 우대회원 모집계약을 체결하면서 자신의 판매점, 총대리점 또는 연락사무소 등의 명칭을 사용해 회원모집 안내를 하거나 입회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승낙 또는 묵인하였다면 민법 제125조의 표현대리가 성립할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대리권의 범위를 넘어 대리행위를 한 경우는 민법 제126조에서 규정하는 대로 일명 ‘권한을 넘은 표현대리’라고 한다. 이 경우는 기본적으로 어떤 대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대리권의 범위를 넘어 대리행위를 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기본대리권’이 존재해야만 하고, 상대방이 자칭 대리인에게 대리권이 있다고 믿고 그와 같이 믿는 데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권한을 넘은 표현대리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기본대리권’과 ‘정당한 이유’가 존재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민법 제827조에서는 ‘부부는 일상의 가사에 관해 서로 대리권이 있다’며 일상가사대리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다. 그래서 부부 중 한 사람이 무단으로 배우자를 대리해 한 행위와 관련해 권한을 넘은 표현대리에 해당하는지 논란이 많은데, 관건은 상대방에게 ‘대리권이 있다고 믿은 데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다.

일반적으로 아내가 남편이 부담하는 사업상의 채무를 남편과 연대해 부담하기 위해 남편에게 채권자와의 채무부담약정에 관한 대리권을 수여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사진 piqsels]

일반적으로 아내가 남편이 부담하는 사업상의 채무를 남편과 연대해 부담하기 위해 남편에게 채권자와의 채무부담약정에 관한 대리권을 수여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사진 piqsels]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빚을 지고 있던 어떤 사람이 채권자를 자신의 집 부근으로 오게 한 후 아내로부터 위임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내 명의의 채무부담약정을 한 사례가 있었다. 부부간에 서로 일상가사대리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아내가 남편이 부담하는 사업상의 채무를 남편과 연대해 부담하기 위해 남편에게 채권자와의 채무부담약정에 관한 대리권을 수여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남편이 처의 도장을 쉽사리 입수할 수 있었으며 채권자도 이러한 사정을 쉽게 알 수 있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정당한 이유’를 부정하였다.

반대로 정당한 이유를 인정한 사례도 있다. 일상가사대리권 외에 별도의 기본대리권이 있는 아내가 근저당권설정등기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소지하고 있었고, 그 인감증명서가 남편이 발급받았으며, 남편이 스스로 아내에게 인감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문서와 남편의 무인이 찍힌 위임장 및 주민등록증 등을 제시했다면 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대리권을 수여했다고 믿게 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 상대방은 아내가 남편을 대리할 적법한 권한이 있었다고 믿는 데 정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표현대리의 성립을 인정한 사례다.

한편 대리인이 대리행위의 표시를 하지 않고 자기가 마치 본인인 것처럼 속여 본인 명의로 직접 법률행위를 한 경우는 어떨까. 원칙대로 하자면 ‘대리’라는 기본적인 요건조차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는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실무에서는 본인인 것처럼 행동한 사람에게 본인을 대리할 기본대리권이 있었고, 상대방은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본인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믿는 데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면 위 표현대리의 법리를 유추해 적용하고 있다.

2018년 대구지방법원에서 판결한 사례를 살펴보자. 남편과 함께 주유소를 운영하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아파트를 사주려는데 매수자금 일부를 대출받기 위해 같이 은행에 갈 것을 요청했다. 시어머니의 요청을 수락한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함께 은행에 가서 자신 명의의 대출거래용 계좌를 개설한 다음 그 계좌의 통장과 인터넷 뱅킹 보안카드 등을 시어머니에게 주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주유소에 유류를 공급하는 정유사에 대한 외상물품대금채무의 지급을 담보하기 위해 보험회사와 보증보험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연대보증인이 추가로 필요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며느리로부터 받은 보안카드를 이용해 은행 홈페이지에서 며느리 명의의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은 다음 그 공인인증서로 보험회사의 홈페이지에 로그인해 위 연대보증서류에 전자서명을 함으로써 보험회사와 며느리 명의의 연대보증계약이 체결됐다. 이 과정에서 보험회사가 당사자인 며느리에게 본인이 위 연대보증계약을 체결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법원은 추가적인 본인확인 절차 없이 연대보증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아 며느리의 책임을 인정했다. 며느리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억울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정리해 보면 표현대리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① 앞에서 설명한 3가지 유형처럼 마치 대리권이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상황에서 ② 상대방은 대리권이 있다고 믿고 ③ 그와 같이 믿은 것을 비난할 수 없는 정당한 이유, 즉 과실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표현대리가 인정되느냐 여부를 떠나 불필요한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결국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어떤 법률행위를 하는 경우 그 사람이 본인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맡기는 경우 그 사람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특히 최근에는 인감도장이나 인감증명서뿐만 아니라 공인인증서와 같은 전자문서 관리도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변호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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