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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탄 버스에서 총격전···결국 수류탄 터트린 실미도 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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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3년 4개월 동안 참을 만큼 참았다. 다 죽이고 서울로 가서 억울함을 알리자.”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인천의 무인도인 실미도. 해변에서 멀지 않은 가건물의 막사 안으로 여명이 비쳤다. 기간병들의 간단한 점호가 끝나자 공작원 2명이 발소리를 죽인 채 교육대장실로 숨어들었다. 군복을 챙겨입던 교육대장은 공작원이 휘두른 망치를 맞고 즉사했다. 공작원 둘은 카빈총 실탄 60발을 탈취해 내무반에서 청소 중이던 동료들과 나눠 가졌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②탈출 D-Day, 날이 밝다

총소리를 신호탄으로 실미도 탈출

오전 6시30분. ‘탕’. 새벽 공기를 가르는 총성을 시작으로 공작원들은 기간병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30여분간의 총격전 끝에 공작원들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탄약창고를 털어 기관총과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실탄을 챙겼다. 부대를 장악한 공작원들이 다시 내무반 앞에 집결했다. 24명이던 공작원 중 2명이 교전 중 숨졌고, 생존자는 22명이었다. 공작원들은 다시 위장복으로 갈아입고 서울행을 결의했다. “서울 중앙청이나 사령부로 가 우리들의 억울함을 알리자.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폭하자.”

“기간병을 사살하지 않고는 도저히 탈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각자 장전된 소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이서천 공작원·재판기록) 

“공작원들이 ‘기간병 한 명쯤을 증인으로 남겨놓자’며 나를 살려줬다는 걸 나중에 들었습니다.”(생존 기간병 한모씨·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면담)

 1971년 8월 23일 공작원들이 탈출한 직후 찍은 실미도 해안 모습. 중앙포토

1971년 8월 23일 공작원들이 탈출한 직후 찍은 실미도 해안 모습. 중앙포토

군, 초병 ‘중무장 병력 이동’ 보고에 비상

오전 8시45분. 공작원 22명은 실미도 근처 무의도에서 구한 작은 고깃배를 타고 실미도를 탈출했다. 정기성 등 공작원 4명이 배를 구해왔고, 나머지는 산 중턱에 몸을 숨긴 채 건빵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실미도를 출발한 공작원들이 탄 고깃배는 정오쯤 인천 송도 앞바다에 닿았다. 배에서 뛰어내리자 무릎까지 빠졌다. 갯벌을 빠져나온 공작원들을 육군 33사단 해안 초소병이 막아 세웠다. “잠깐 멈추시오. 어디서 온 부대입니까?” 초병의 눈초리가 번뜩였다. 정기성 공작원이 나섰다. “이거 보면 모르나.” 낙하산 모양의 부대 마크를 보여주며 “훈련 중”이라고 쏘아붙였다. 기세에 눌린 초병이 물러섰다.

오후 1시. 송도에서 인천 시내로 넘어가는 조개 고개에서 공작원들은 잠시 한숨을 돌렸다. 군복에 묻은 흙을 씻어내고 물을 나눠 마셨다. 마침 고개를 지나던 항도여객 버스를 잡아 탔다. 승객 6~8명이 타고 있었다. “서울로 가자!” 겁에 질린 운전기사가 버스를 출발하는 순간 매복해 있던 군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해안 초소를 무사 통과한 만큼 큰 탈 없이 서울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란 공작원들의 기대는 착오였다. 육군은 해안 초소로부터 ‘자동화기로 중무장한 위장복 차림의 병력 20여명이 이동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3~5분간의 교전 끝에 공작원 3명이 숨졌다. 또 버스 운전사가 오른팔 관통상을, 육군 하사 1명이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서울 도착했지만 6시간 만에 탈출 실패

오후 2시15분. 군의 추격을 따돌린 공작원들은 수원발 태화여객 버스로 갈아타고 서울 대방동 삼거리에 도착했다. 버스 승객 7~8명이 탑승한 채였다. 삼거리에서 버스가 나타나자 노량진 경찰서 기동타격대가 총탄을 퍼부었다. 경찰의 급습을 받은 공작원들도 창밖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버스는 경찰의 총탄을 뚫고 수백m를 달렸지만 끝내 유한양행 본사 앞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섰다. 버스 안에 이제 남은 공작원은 8명, 피땀에 젖은 이들은 작전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실미도를 탈출하며 실패하면 자폭한다고 결의했던 공작원들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버스에서 민간인들이 기어 나오는 걸 보고 회사(유한양행) 간호사를 데리고 제일 먼저 버스에 올랐습니다. 운전석에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이 운전대를 끌어안고 축 늘어져 있었어요. 공작원들은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고, 민간인들만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터지지 않은 수류탄 2발도 보였고요. 부상자를 부축해 밖으로 내보내 잔디밭에 눕혔습니다.” (당시 유한양행 직원 이모씨·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면담)

서울 대방동 삼거리 인근에서 실미도 공작원들이 자폭한 버스 내부 모습. 중앙포토

서울 대방동 삼거리 인근에서 실미도 공작원들이 자폭한 버스 내부 모습. 중앙포토

정부 “무장공비 침투, 특수범 난동” 발표 

실미도 공작원들의 탈출은 약 6시간 만에 서울 대방동에서 끝났다. 이날 공작원 24명 중 20명이 숨졌고, 4명 만이 살아남았다. 또 민간인 6명, 군경 20명이 사망했다. 사건 직후인 오후 3시쯤 간첩대책본부는 “무장공비들이 서울 침투를 기도했다. 민간버스를 탈취해 부평을 거쳐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했다가 군·경·예비군에 의해 저지됐다”고 발표했다. 약 3시간 뒤인 오후 6시 36분 정래혁 당시 국방장관이 발표를 수정했다. “공군 관리하의 특수범 24명이 격리 수용된 데 불만을 품고 관리원들을 사살, 집단으로 탈출, 난동을 벌였다.” 국방부의 발표 직전 실미도에서는 김모 소대장과 상급 부대의 최모 대위가 실미도 부대와 관련된 모든 서류를 불태웠다.

실미도 부대의 공작원 24명은 누구일까. 군은 어떤 이유로 사건 발표 직전 관련 서류를 모두 태워버린 것인가. 다음 회에서는 실미도 공작원 24명은 누구이고, 실미도 부대는 왜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한다. 실미도 부대 창설 직전 북한의 '김신조 게릴라 부대'가 청와대를 급습했다.

※2006년 발표된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보고서(국방부 과거사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1971년 8·23 실미도 부대 탈출.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1971년 8·23 실미도 부대 탈출.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김민중·심석용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지난 기사
도심 총격전 끝 24명 즉사·사형…실미도 50년, 총성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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