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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 교향곡’에서 배우는 예술적 소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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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그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적 소리를 시간의 흐름 속에 조직한 청각적 구조물, 그것을 절대음악이라 한다. 말로 설명해도 어려우니 그런 음악을 듣고 미적 감흥을 얻기는 더더욱 어렵다. 음악을 들으며 구체적 표현대상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대부분 연목구어(緣木求魚)에 가깝고, 전문가의 친절한 설명은 그 음악 자체와는 무관한 뒷이야기 아니면 알아듣기 어려운 전문적 해설로 치닫기 일쑤다.

맥락없는 음악적유머는 청중모독 #구조적 완결성 있어야 감동 받아 #선의의 피해 양산 정책은 바꿔야

하이든의 교향곡 ‘놀람’을 예로 들어보자. ‘놀람’이라는 부제는 2악장의 여린 맥락 가운데 뜬금없이 등장하는 강한 총주(總奏)에서 비롯됐다. 졸음이 밀려올 즈음 느닷없이 울리는 ‘쾅’ 소리에 혼비백산할 청중을 떠올리며 하이든이 짓궂은 음악적 유머를 발휘한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이면 제법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이 곡의 본질과 무관하다. 반면 “1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주제와 네 개의 변주, 3악장은 스케르초에 가까운 미뉴에트, 4악장은 소나타 론도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로 이어지는 해설은 연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청중을 질리게 한다.

이렇게 작품에 얽힌 뒷이야기도, 전문적 해설도 깊이 있는 감상에 별다른 도움이 못 되니 클래식 음악은 멀기만 한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음악적 식견이 일천해도, 감상할 음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도 음악은 들린다. 음악을 들으며 가슴이 뛰거나 눈가가 촉촉해진 경험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음악에 관한 전문지식은 그 감동적인 순간을 만드는 방법까지 알고 싶을 때나 필요한 것이다. 음악학자 미들톤(Richard Middleton, 1945~)은 음악을 “유사 언어적 요소의 위계 구조로서 음악적 요소가 규범·기대·놀람·긴장과 이완의 맥락에 함께 어우러진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니 음악을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감상하는 것도 시도해 볼 만하다. 음악과 문학은 각기 ‘추상적 소리’와 ‘구체적 언어’라는 상반된 매체를 취하지만, 공히 맥락과 관계에 기반을 둔 구성을 토대로 한다.

하이든의 일대기를 쓴 그리징어(G.A.Griesinger, 1769~1845)가 ‘놀람 교향곡’의 갑작스러운 총주에 대하여 “잠든 청중을 깨우기 위해 그리했는지” 물었을 때 하이든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의도한 것은 청중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놀라움을 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문현답이다. 잠든 청중을 깨우려 음악적 맥락과 무관하게 갑작스레 팀파니까지 동원해 큰 소리를 냈다면 그것은 음악적 유머가 아니라 ‘청중 모독’이다. 물론 청중이 놀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놀람이 청중에게 모욕적으로 들릴지, 새로운 음악적 경험이 될지는 그 전후에 놓인 음악적 사건과의 관계에 달려있다.

하이든이 말한 ‘새로운 것을 통한 놀람’은 규범과 기대에 반하여 청중이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놀람’의 구조적 필요성을 청중이 납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구현된다. 간단히 말해 문맥을 벗어난 갑작스러운 울림과 마지막 변주에 등장하는 ‘팀파니 연타’(사실 이것이 이 곡의 독일어 원제목이다)는 각기 예시(豫示)와 현현(顯現)에 해당한다.

베를리오즈 교향곡 ‘환상’ 4악장 말미의 우아한 선율이 ‘쾅’ 소리와 함께 단절되는 상황 또한 놀람 교향곡 이상으로 의아스럽다. 하지만 그 순간이 단두대 위의 한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리는 장면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면 슬픈 사랑의 끔찍한 결말이 눈 앞에 펼쳐진다. 베토벤 교향곡 ‘합창’ 4악장 전반부의 현악 레치타티보 사이사이에 삽입된 네 개의 이질적 단편도 생뚱맞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는 각기 앞서 연주된 1, 2, 3악장의 주제와 뒤이어 나타날 ‘환희의 송가’의 불완전한 형태로서, 지나온 시간에 대한 회상과 다가올 순간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다. 따라서 이 이질적 단편은 역설적으로 구조적 완결성을 더한다.

놀람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의 느낌이다. 그 이유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을 수반한다. 의아함, 두려움, 어이없음, 경탄 등. 그러니 감상자가 당혹스러워할 만한 일을 벌이려면 책임질 각오부터 다져야 한다.

음 하나 넣고 빼는 것이, 붓칠 한 번이, 단어 하나 바꾸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냐만 작가에겐 작품의 완결성을 담보하는 치열한 과정이다. 작품이란 것이 작가의 개인적 산물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의도를 합리적으로 드러내고자 최선을 다한다. 하물며 선한 의도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법규라면, 납득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상처를 헤집는 발언이라면, 다수가 동의하더라도 누군가 피해를 보는 정책이라면 몇 번이고 재고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예술적 소양이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