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안희정, 오거돈 그리고 박원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이혁진 소설가

이혁진 소설가

고 박원순씨의 자살은 참을 수 없는 웃음거리가 됐다. 자살하고 나니 자살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이 상황 때문이다. 피해자는 한동안 감히 피해자라고 불리지조차 못했다.

지지자들의 진영논리에 갇혀 #희극이 되고 만 박원순의 비극 #더이상 망자 모독하지 않으려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멈춰야

지금도 무수한 2차 가해로 피해사실은 부정당하고 고통은 경멸당하며, 4년의 번민 속에 나온 고소는 지탄받고 있다. 공소권을 상실한 수사는 진전의 기미조차 없다. 고인뿐 아니라 누구라도 이 상황이면 생각할 것이다. ‘안 해도 될 걸 그랬어.’

많은 ‘수고’의 결과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특별시 장(葬)을 치렀다. 청와대는 성추행 논란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조화를 보냈고, 여당의 대표라는 이해찬씨는 병원 앞에서 기자들에게 막말을 쏟아냈다.

지인과 지지자들은 앞다투어 고인의 업적과 인격을 칭송하며 추억을 회고했다. 과연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을까? 서울시는 지난 4년간 20여명에게 했다는 피해자의 호소를 듣지 않았다. 청와대와 여당은 안희정씨와 오거돈씨에 이어 곤두박질치게 될 집권세력의 위신을 어떻게든 지켜내야 했다. 지인과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추억과 믿음이, 자신들의 진영이 훼손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모두 고인과 피해자보다 자신들이 더 중요했을 뿐인, 위선자들이다. 장례식이라는 세숫대야에 더러운 손을 담가 씻고 싶었던.

지독한 농담 같은 역설이 있다. 위력에 의한 성추행은 그것만으로 끝난다면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나쁜 일이 얼마든지 있다. 이를테면 성추행 후 결혼이다. 여자는 결혼 기간 내내 자신이 성추행당하고 있다는 말도 못한 채, 어쩌면 성추행을 인지조차 못 한 채 성추행당해야 한다. 여자는 당할 것을 모조리 당한 다음 어떤 권리도 보호받지 못한다. 그런 채로 세간의 모욕과 비난까지 받아야 한다. 안희정씨가 저지른 짓이 이것이고, 지금까지 최악이었던 성추행이다.

하지만 이제 최악의 자리는 고 박원순씨의 것이다. 성추행 후 자살. 여자는 무시당하고 지워진다. 가해자는 칭송과 추모를 받으며 반푼어치의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 달빛 속에서 천사들과 함께 올라 성추행자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 가장 높은 의자에 앉는다.

망자를 모독하는 말일까? 하지만 이 말이 모독이 되려면 망자의 행위와 위법 여부가 먼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정상인들이 원하는 것도 그것이다. 서울시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서 독립한 인물과 기관이 수행하는 엄밀하고 공정한 수사. 고인을 사랑했다는 당, 지지자들 역시 이것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꾸 피해자에게만 뭔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의심과 음모를 덧씌운다. 아니면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투로 침묵한다. 밝히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감추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의 위선을.

자신과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명백한 사태를 축소하고, 참혹한 고통을 외면하고, 피해자를 조롱하고 야유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를 무시하고 지우려는 모든 개소리와 침묵이 세월호 유가족 옆에서 피자와 치킨을 시켜먹던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침몰해가는 세월호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던 방송처럼, 피해자의 호소를 들었던 서울시 관계자들도 가만히 있으라고 회유하고 강요했다. 그들의 침묵은 결국 그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고 불렀던 여당 의원들. 그들은 가슴에 세월호 배지를 달 자격이 있는가?

이 피해와 고통 앞에 부족한 것은 공감 능력이 아니다. 우리는 짐승보다 사람에게, 이성보다 동성에게 더 쉽게 공감한다. 공감 능력은 본래 동류를 향한다. 그래서 ‘내로남불’이 당연시되고 있는 이 상황이다.

피해자를 무시하고 지우려는 작자들에게 없는 것은 지성이다. 자신을 객관화하고 사태를 보편화할 수 있는 지능과 상상력, 그리고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아는 현대성이 그들에게는 없다. 자신들이 재래식 변소처럼 후락(朽落)하다는 것조차 모를 만큼 끔찍하고 악취 나게 멍청하다.

고 박원순씨의 자살은 그것을 증명한다. 두려움 없던 인권변호사, 담대히 광장을 수호했던 서울시장의 이 옹졸한 죽음은 위선자와 멍청이들의 더러운 손이나 씻어주는 세숫대야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그의 최후가 참을 수 없는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이 자살에 가해지는 최종적 형태의 치욕이다.

이혁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