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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당신은 ‘라이너스의 담요’ 하나쯤 가지고 있나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59)

‘라이너스의 모포’. 무려 50여 년이(1950~2000) 넘는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한 만화 ‘피너츠’에 등장해 이제는 하나의 심리용어로까지 자리 잡은 말이다. 꼬질꼬질한 담요와 한 몸이다시피 지내는 귀여운 라이너스, 우리에겐 스누피로 더 알려진 찰스 먼로 슐츠(1922~2000)의 만화 속 인물이다.

늘 함께하는 담요를 지니지 않으면 기운도 없고 만사가 시무룩해지고 만다. 해서 사물에 집착하는 현상을 두고 ‘라이너스의 모포’라는 용어까지 생겼다고 한다. 만화여서 그랬을까? 내 눈에 그 파란 담요는 집착은커녕 앙증맞고 귀엽기만 했다.

일본 요나고지역의 요괴열차를 타고 떠났던 여행. 남편의 낡은 가방은 십여년째 여행길을 함께 하고 있다. 갤럭시탭S3 ,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일본 요나고지역의 요괴열차를 타고 떠났던 여행. 남편의 낡은 가방은 십여년째 여행길을 함께 하고 있다. 갤럭시탭S3 ,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낡고 해진 가방은 추억일까 애착일까

짧은 여행이라도 떠날라치면 우리 부부는 별거 아닌 거로 신경전을 벌이곤 한다. 저마다의 일정 때문도 혹은 민감한 비용 때문도 아니다. 바로 그림 속 낡은 가방 때문이다. 사실 그림이기에 망정이지 실물은 거의 못 봐줄 정도로 낡은 모양새다. 실밥은 해져서 너덜거리고 색은 바랬으며 어디서 묻었는지 지워지지 않는 얼룩까지, 총체적 난국이다.

진즉부터 그 모양이 거슬렸던 난 이내 버릴 요량으로 한쪽에 치워두었다. 그리고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쇼핑몰의 포인트와 쿠폰까지 꼼꼼하게 활용해 남편의 여행 가방을 새로 샀다. 얼마나 튼튼하고 트렌드도 따라가는 멋진 가방인지, 또 나름 알뜰하게 샀는지 남편에게 한참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당장 예전 가방을 찾아오라며 표정이 안 좋아진다. 아니 왜? 이렇게 깨끗하고 좋은 새 가방이 있는데? 하필 누가 주워가지도 않게 생긴 가방을 찾는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별것도 아닌 일로 감정이 상해버리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원래 부부싸움은 티끌만 한 일로 시작되는 법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낡은 가방이지만 그 가방과 함께했던 시간이 십여 년 가까이 되었으니 말이다.

전쟁터 같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만 며칠이라도 훌훌 털고 떠났던 여행길, 그 단비 같은 추억을 함께해준 가방이었으니…. 하는 수 없이 슬그머니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 가방은 지금까지도 남편의 여행길에 동행해주는 동반자가 되어 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날 때면 군소리는 여전히 나의 몫이 되고 있다.

비록 물건이지만 그 안에 담긴 추억과 시간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는 캐릭터 '라이너스'는 항상 파란담요를 지니고 다닌다. [사진 책 'Charles M. Schulz's Linus' 표지]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는 캐릭터 '라이너스'는 항상 파란담요를 지니고 다닌다. [사진 책 'Charles M. Schulz's Linus' 표지]

아들은 스무 살이 넘도록 서너 살 무렵부터 베고 자던 베개를 고집하곤 했다. 아이가 어렸을 땐 혹시 무슨 무슨 애착 증후군이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아동 심리학책을 기웃거리며 큰일이라도 난 듯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때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르고 보니 그 베개는 애착 혹은 집착이 아니라 그냥 편한 친구였던 모양이다. 괜한 걱정을 한 셈이다.

지금, 그렇게 죽고 못 살던 베개는 머리 대신 가랑이 사이에 끼고 자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게 우스울 뿐이다. 하긴 20여 년이 넘은 베개다 보니 앞서 말한 남편의 헌 가방은 거의 ‘신상’ 수준이다. 머리에서 다리로 등급하락 될 만도 하다.

하지만 낡은 베개는 아들에겐 오래된 친구임이 틀림없다. 이등병 시절 첫 휴가를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건 햄버거도 콜라도 치킨도 아닌 낡은 베개였으니.

생각해보니 나도 애착을 가진 물건이 하나 있다. 평소의 난 분리수거일에 뭔가를 버리고 오면 그렇게 가뿐하고 후련할 수가 없었다. 쌓아두기보단 버리기를 좋아하는 습관도 한몫했던 까닭이다. 입버릇처럼 저걸 버려야 하고 이건 누굴 줘야 한다며 목록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못 버리는 것이 있다. 20여 년이 된 나무이젤이 그것이다. 고급품도 아니고 흔히 볼 수 있는 막대기를 얼기설기 얽어놓은 볼품없는 모양새다. 당연히 시커멓게 썩은 부분도 있고 균형도 맞지 않았다. 걸핏하면 넘어지는 불상사도 일어나곤 하는 거의 고물에 속한다. 캔버스를 올릴 때면 볼펜 자루나 붓을 고정대에 끼워 넣어야 겨우 반듯해지는 나무이젤이다.

이사를 할 때도 이삿짐 일꾼은 버리는 물건 취급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때마다 도로 짐 속에 꾸려 넣느라 바빴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이 물건을 난 왜 버리지 못할까? 사실 요즘엔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데도 그렇다. 어쩌면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 가졌던 설렘과 꿈이 나뭇결에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도 죽으라고(?) 버리지 못하는 애착 물건이 있던 셈이다. 제법 번듯한 새 이젤을 사고도 아직도 이걸 못 버리는 걸 보면.

사실 우리 모두에겐 ‘라이너스의 모포’처럼 또 하나의 친구가 늘 곁에 있는지도 모른다. 앞에 나서진 않아도 늘 뒤에서 응원하고 용기를 주는 그 누군가처럼. 낡은 것에서 오는 소박한 평온함이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나도 그 누군가에게 ‘라이너스의 모포’처럼 기대고 싶고 위안이 되어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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