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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아파트 외벽에 널린 빨래가 집값 하락 요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56) 

‘빨래 끝!’

주부라면, 아니 살림을 하는 이라면 다 안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가뿐하고 상쾌한지를! 짐작하다시피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깨끗하게 만들었던 세탁세제 광고문구다. 탁탁 두드리고 툭툭 털어 너른 마당 빨랫줄에 걸린 빨래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던 엄마의 얼굴….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널어놓은 빨래는 숨바꼭질 장소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추억, 누구나 있을까? 물론 나도 있다. 하지만 20여 년도 전의 일이다.

아파트 외벽에 널린 빨래는 흉물?

여행을 하면서 만난 이탈리아 라스페치아 마을의 빨래가 걸린 풍경, 갤럭시탭 S6.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여행을 하면서 만난 이탈리아 라스페치아 마을의 빨래가 걸린 풍경, 갤럭시탭 S6.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오전 10시쯤, 관리사무소의 방송이 시작된다. 아마도 부녀회장의 목소리인 듯 싶다. 평소엔 전자음으로 또박또박 전달사항을 안내하던 방송이었다. 오늘은 무척 화가 난 듯 빠른 말투의 목소리가 쿵쿵거리며 스피커를 타고 온다. 아파트 벽에 제발 이불 빨래를 널지 말라는 지시사항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외관상 보기 싫다는 거다. 베란다 외벽이나 난간의 위생은 어차피 개인의 문제이니 들먹거리지도 않는다. 남들이 보면(여기서 남들은 다른 아파트 주민을 칭한다) 서민 아파트로 보일 수도 있어서 집값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을 힘주어서 한다.

사실 외관상으로 본다면야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아파트는 공동주택이고 보니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사항이 좀 많은가. 개 목줄도 짧게 해야 하고 세탁기도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은 돌릴 수도 없다. 행여 베란다에서 고기를 굽는 집이 있으면 당장 안내방송이 튀어나오곤 한다. 언제부턴가 빨래, 특히 이불 빨래는 그 중 민감한 문제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아이가 어릴 때였던 이십여 년 전만 해도 햇볕이 좋은 날엔 커다란 이불 집게를 이용해 이불을 널곤 했다. 뽀송뽀송하게 말라가는 이불을 보면 어찌나 흐뭇했던지 모른다. 이제는 그런 일들이 옛말이 되었다. 외관상의 이유라면 그럴 만도 하다 싶다. 하지만 거창하게 집값까지 들먹이는 데는 못내 아쉽다.

카페 같은 빨래방

최근들어 부쩍 늘어난 동네빨래방. 휴식의 장소로도 부족하지 않을만큼 진화중이다. [사진 홍미옥]

최근들어 부쩍 늘어난 동네빨래방. 휴식의 장소로도 부족하지 않을만큼 진화중이다. [사진 홍미옥]

지난여름 장마가 길어지고 온 집안이 꿉꿉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빨래는 잘 마르지 않았고 퀴퀴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이제는 건조기를 들여놓아야 할 모양이라고 고민을 하던 차에 동네 어귀의 빨래방이 생각났다. ‘살균건조, 뽀송세탁’ 생각만 해도 상쾌해진다.

커다란 비닐 가방에 이불, 베갯잇 등을 담고 그곳으로 갔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엔 세탁기들이 조용하면서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향긋한 세제향과 책꽂이 옆의 커피머신이 풍기는 커피 향도 은은했다. 고객층도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취생 일색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온 젊은 아빠도 있고 나이 지긋한 노부부도 보였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하이에나’의 김혜수. 주지훈도 그 유명한 빨래방 로맨스를 탄생시켜서 인기를 끌었는데, 과연 이곳이 빨래방인지 카페인지 헷갈릴 정도다. 저마다 깨끗해질 빨랫감을 기다리며 책도 읽고 휴대폰에도 열중이다.

빨래터의 ‘쉼’을 꿈꾸며

창덕궁 담벼락에 위치한 종로구 원서동 빨래터. 한양의 3대 빨래터 중 하나로 알려져있다. [사진 홍미옥]

창덕궁 담벼락에 위치한 종로구 원서동 빨래터. 한양의 3대 빨래터 중 하나로 알려져있다. [사진 홍미옥]

창덕궁 담벼락을 등지고 있는 북촌 원서동엔 조선 시대의 빨래터가 남아있다. 대다수 궁궐의 일을 하던 사람이 살았던 동네라고 알려진 원서동이다. 궁궐에서 흘러나오는 냇물은 자연스레 빨래터를 만들었다. 당시 궁녀와 주민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알려진다. 대화의 장이기도 했던 빨래터엔 아직도 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그 빨래터에는 이야기꽃을 피우는 여인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대다수가 공동주택에 사는 요즘 새하얀 빨래가 휘날리는 너른 마당은 언감생심이다. 좀 더 넓은 공간 확보를 위해 베란다를 없애는 집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다 보니 이불 빨래를 말리는 일은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다. 누구나 마당 있는 집에 살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베란다 외벽에 널었다간 공공의 적(?)이 되어서 아침 방송을 탈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하긴 하지만 뽀송뽀송하고 빳빳하게 마른 이불은 희망 사항이 되어버렸다. 대신에 온갖 기능을 장착한 건조기 광고에 등장하고 있다. 곧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다. 하는 수없이 빨래방의 대형건조기 신세를 져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만은 햇빛 쏟아지는 빨래터의 ‘쉼’을 꿈꾼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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