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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학교 앞 서점처럼 정겨운, 동네책방이 돌아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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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54)

그땐 그랬다. 해마다 신학기가 다가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곳이 많았다. 예를 들면 ‘모자’, ‘명찰’이라고 쓰여 있는 상점들이다. 대개는 책가방도 함께 판매하던 곳이지만 신학기엔 본업인 가방보다 분주한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학생모자 안쪽이나 가슴팍에 부착할 이름표, 명찰이라 부르는 그걸 만들기 위한 일이다. 노랗고 하얀 비닐 위에 멋들어지게 새겨지던 우리의 이름은 기나긴 줄을 서는 기다림이 필요했다. 새 학년이 될 때마다 그건 당연시되는 통과의례였다고 할까? 그리고, 서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주의 주택가에 자리한 동네책방. 갤럭시탭 S6,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전주의 주택가에 자리한 동네책방. 갤럭시탭 S6,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삼촌 같고 이모 같던 동네서점과 문방구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앞엔 자그마한 서점이 있었다. 시내엔 이미 소문난 대형서점이 버티고 있었지만 학교 앞의 이곳도 학생 손님들로 붐비곤 했다. 신학기가 되면 학교 앞 문방구와 서점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빳빳한 참고서와 새 공책을 한 아름 들고 나서는 기분은 정말 좋았다. 자습서, 참고서도 잘 팔렸지만 80년대 서점의 베스트셀러는 뭐니뭐니해도 학생 전용 잡지였다. ‘여학생’, ‘여고시대’, ‘주니어’ 등의 이름을 단 월간지다.

간혹 좋아하는 연예인의 브로마이드가 부록으로 딸려 나오는 달엔 그야말로 인기폭발이었다. 생각해보니 서점주인은 우리들의 취향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달의 특집으로 유명가수가 나온 기사, 혹은 당시 여고생들에게 인기 있던 소설 하이틴로맨스 신작 소식을 문에 붙여두곤 했다. 그 와중에도 고전 문학전집은 꼭 매대 가운데에 진열하고 열독을 권하기도 했다. 선 자리에서 책 한 권을 후다닥 읽고 나와도 눈치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서점과 딱 붙어있던 문방구는 그야말로 만물상이었다. 학용품은 말할 것도 없고 수예용품이나 체육복 위생용품까지 없는 게 없다. 점심시간이면 도넛을 팔기도 해 우리들은 풀 방구리 생쥐 드나들듯 오가곤 했다. 푸근한 문방구 주인은 집을 떠나 자취나 하숙을 하던 친구들에겐 부모 대신으로 병원엘 데리고 가주기도 했다. 몇 년 전 그곳을 찾았다. 예상대로 서점도 문방구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하긴 지나온 세월이 어딘데 여태껏 있을까마는 못내 서운했다.


동네책방은 주민들과 함께 소통하며 새로운 서점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사진 홍미옥]

동네책방은 주민들과 함께 소통하며 새로운 서점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사진 홍미옥]

꿈을 꾸던 다락방처럼 포근한 동네책방이 늘어난다. 언제부턴가 북카페, 독립서점, 동네책방 이런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굳이 시내 한복판의 대형서점엘 가지 않아도 클릭 몇 번으로 책을 살 수 있는 시대다. 심지어 책도 조만간 새벽 배송을 개시할 거라는 뉴스도 있다. 온갖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좀체 정이 들지 않았을까?

언젠가부터 ‘책방’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작은 책방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북카페를 겸하고 있는 그곳들은 커피 향기와 책 내음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우울하게도, 생기는 수만큼 문을 닫곤 한다지만 그래도 꿋꿋하다. 먼 곳이든 아니면 구석진 곳이든 동네 책방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대부분 작은 공간이지만 책방에 들러 책을 보고 차를 마시는 일은 즐겁다. 친구들끼리 독서 모임을 하기도 하고 햇살 좋은 날엔 책방 앞 의자에서 책 내음을 맡아도 좋겠다. 솜씨 좋은 책방주인이 만드는 소품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보고 싶은 책을 주문하기도 한다. 주문한 책은 대형업체의 쇼핑몰처럼 당일 배송은 어림도 없다.

얼마 전 방문한 전주의 작은 동네 책방, 귀여운 책 수레가 눈에 들어왔다. 동네 책방을 오가는 사람들이 주문한 책을 담아놓는 수레였다. 요즘처럼 빠른 게 최고인 시대,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즐기는 기다림은 더 특별할지도 모른다. 그 마음 한편엔 동네 책방을 응원하는 어여쁜 마음도 함께일 것이다.


동네책방에 불어오는 은은한 바람

서울 관악구의 주택가에 문을 연 동네책방. 갤럭시탭S6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서울 관악구의 주택가에 문을 연 동네책방. 갤럭시탭S6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지난겨울 전시가 인연이 되어 동네 책방을 드나들게 되었다. 갈 때마다 그곳엔 날마다 다른 세상이었다. 창가에 앉아 열심히 글을 쓰는 이, 책 한 권을 앞에 두고 푹 빠져버린 사람, 책 속의 행간을 찾아 열심히 토론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서가를 정돈하고 책 수다에 기꺼이 동참하던 어여쁜 책방주인을 보노라면 그 옛날 학교 앞 서점에서 느꼈던 정겨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 곳이 문을 열면 어느 곳에서 문을 닫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오늘도 책방 문을 열고 서가의 먼지를 털며 책들과 인사를 하는 우리의 동네책방! 정답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모쪼록 은은한 바람이 되어 책방을 찾아오는 발길이 늘어나기를 소망한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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