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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플랫폼서 잽싸게 먹던 대전역 가락국수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57)  

쑥갓 향이 확 밀려왔다. 어릴 적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향이다. 듣기로는 냄새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외로 지대하다고 한다. 굳이 유명 소설가의 구절을 들먹이지 않아도 말이다.

우연히 들른 기차역의 국숫집, 뜨거운 국수위에 얹어진 쑥갓이 전하는 친근한 향이 밀려왔다. 아! 기억은 고속열차보다 빠르게 내달음을 친다. 정거장 가락국수, 도대체 얼마 만에 맛보는 맛인지…게다가 여긴 대전역, 기차역 플랫폼에서 재빠르게 먹어 치우는 가락국수가 탄생한 곳이다.

가락국수의 추억. 8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 주요역의 플랫폼에는 정거장가락국수가 인기를 끌었다. 갤럭시탭 S6.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가락국수의 추억. 8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 주요역의 플랫폼에는 정거장가락국수가 인기를 끌었다. 갤럭시탭 S6.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기차역 가락국수의 향긋한 추억

어릴 적 엄마와 함께 서울에 다녀올 때면 특급열차라 이름 지어진 기차를 타곤 했다. 이리(지금의 익산)역을 출발한 열차는 논산을 거쳐 서대전역에 정차했다. 당시에는 기술적인 문제로 호남선과 경부선이 이곳에서 선로를 바꾸느라 정차 시간이 여느 역보다 길었다. 열차가 멈춤과 동시에 사람들은 이때다 싶게 뛰어나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개찰구도 아니고 대합실도 아니었다. 역 플랫폼에 성냥갑처럼 지어진 작은 국숫집이 목표다. 그렇게 10여 분이라는 길지 않은 정차 시간은 기차역 풍경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열차 안에선 수레에 온갖 간식거리를 실은 역무원이 지나가는데 부지런한 승객들은 플랫폼 가락국수를 맛보고 있다. 급하게 먹는 국수는 그 맛이야 뭐 대단하진 않았다.

사실 멸치를 우려낸 육수에 툭 담긴 국수가 무슨 특별한 맛이 있었을까? 고명으로 얹어진 유부는 언제나 감질났고 면은 자꾸만 미끄덩거리며 익은 듯 설익은 듯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열차가 떠날까 봐 뒤돌아보며 먹는 그 맛과 향긋한 쑥갓 내음은 특별했다. 출발을 알리는 역무원의 호루라기 소리에 입가를 훔치며 우르르 뛰어가던 사람들과 은은한 쑥갓 향, 나이가 들어선 지 참 별게 다 그립고 난리다.


기차역 플랫폼에서 재빠르게 먹던 가락국수는 이제 식당가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 홍미옥]

기차역 플랫폼에서 재빠르게 먹던 가락국수는 이제 식당가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 홍미옥]

다시 만난 정거장 가락국수는 여전하고

전국이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 생활권이 되어버린 지금, 미처 졸기도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만큼 모든 게 빨라졌다. 그러다 보니 긴 여행의 헛헛함을 달래주던 플랫폼 가락국수는 추억으로만 남았다. 7월의 첫날, 업무차 들른 대전역 대합실에서 반가운 광고 배너를 보게 됐다.

‘대전역 대표 음식 정거장 가락국수’. 오~~와락 반가운 마음이 밀려왔다.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발걸음은 식당으로 향했다. 플랫폼의 작은 성냥갑 같던 국수 가게는 이젠 옛말이다. 가락국수집은 꽤 넓고 쾌적한 모습이다. 서너 가지의 메뉴가 있었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내가 고른 건 ‘정거장 가락국수’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야말로 LTE 급으로 내 앞에 놓인 가락국수, 속도는 예전과 막상막하다. 호루라기와 지시봉을 들고 기차출발을 재촉하는 역무원이 없음에도 빨리도 나왔다. 그렇다면 맛은?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낸 국물이 뜨겁고도 시원하다. 예의 통통한 국수위에 살포시 앉은 쑥갓! 여전히 향긋하고 여전히 푸르렀다. 어릴 적 엄마 손을 놓칠세라 치맛자락을 잡고 플랫폼에서 먹던 그 향 내음이다. 아! 달라진 것도 있다. 게살 맛의 어묵이 빨간색 옷을 입고 강렬한 존재감을 보인다.

세월은 흘렀지만 정거장가락국수의 맛은 여전하다. [사진 홍미옥]

세월은 흘렀지만 정거장가락국수의 맛은 여전하다. [사진 홍미옥]

가락국수로 입소문이 자자했던 대전역은 그 전통을 살리고자 열심이다. 대전방문의 해를 맞이해 야심 차게 계획했던 일은 안타깝게도 코로나라는 변수에 부딪히고 말았지만, 조만간 새 단장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행자의 휴식과 허기를 달래주던 국수 한 그릇이 따뜻한 추억 열차를 타고 돌아올 모양이다.

기차여행의 묘미가 하나 더 늘어나게 생겼다. 누군가는 떠나고 또 누군가는 돌아오는 정거장. 뜨끈한 온기로 누군가의 속을 채워주던 가락국수가 당신을 마중 나올지도 모르겠다.

※시인 용혜원의 〈대전역 가락국수〉를 소개합니다.

〈대전역 가락국수〉 - 용혜원
늦은 밤 피곤한 몸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다
허기에 지쳐
가락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비닐 봉지에 담긴 국수 한 움큼을
끓는 국물에 금방 데쳐
한 그릇을 내준다.
2,000원짜리 가락국수인지라
내용이 서민적이다.
단무지 서너 조각이
국수 그릇에 같이 담겨져 있고
쑥갓 조금
약간의 김 부스러기
고춧가루가 몇 개 둥둥 떠있다.
시장 탓에
후루룩 젓가락에 말아 넘기면
언제 목구멍을 넘어갔는지 간 곳이 없다.
하지만 기차를 기다리며
막간을 이용하여
먹는 가락국수의 맛은 그만이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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