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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유럽 전체보다 GDP 많던 중국이 신대륙 발견했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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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화의 대원정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시 '대항해시대-바람에 실은 바람'특별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중국 명나라 시대의 대항해가인 정화(1371~1433년)가 이끈 보선 함대 모형을 구경하고 있다.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시 '대항해시대-바람에 실은 바람'특별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중국 명나라 시대의 대항해가인 정화(1371~1433년)가 이끈 보선 함대 모형을 구경하고 있다.

등장인물

정화

정화

정화
(1371~1433). 본명은 마화(馬和)이나 영락제로부터 정씨를 하사받고 개명했다. 남서부 윈난성 출신 색목인으로 왕실에 끌려와 환관이 됐다. ‘마’씨는 무하마드의 음차다. 지략이 뛰어나 태감의 자리에 올랐고 7차례 대원정을 이끌었다.

15세기 정화의 인도·아프리카 원정 #함선 62척에 선원만 2만7800명 #당시 중국 GDP, 유럽 30국의 1.4배 #자율·다양성 토대 과학혁명 역전

영락제

영락제

영락제
(1360~1424).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세계 최대의 궁전인 자금성을 지었다. 환관, 이민족 등 신분에 관계없이 요직에 중용해 정통 관료들과 마찰을 빚었지만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대원정 같은 대담한 정책을 폈다.

조지프 니덤

조지프 니덤

조지프 니덤
(1900~1995). 영국의 과학사회학자. 니덤이 제자들과 함께 쓴 7권 25책의 역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은 15세기 이전까지 중국이 세계적 과학기술강국이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밝혀 서구우월주의를 깨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앵거스 매디슨

앵거스 매디슨

앵거스 매디슨
(1926~2010). 2000년간 세계 경제사를 연구한 영국의 경제사학자. OECD 초대 경제개발부국장을 지낸 뒤 네덜란드 흐로닝언대학 교수로 일했다. 『매디슨 프로젝트』는 기원후 전 세계 국가의 경제 흥망사를 다룬 방대한 연구서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콜럼버스가 아니라 정화(鄭和)였더라면. 지금처럼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이거나 할리우드가 세계 대중문화의 표본이 아닐 수 있죠. 정화의 대원정 후에도 명(明)이 해양 정책을 지속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1405년 정화는 영락제의 지시로 첫 항해에 나섰습니다. 1430년까지 7차례 원정을 떠나 인도의 캘리컷,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아프리카 동안까지 다녀왔죠. 국력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화가 귀국할 때는 아프리카 왕들로부터 사자·표범·기린 같은 조공을 받기도 했고요.

1415년 정화가 아주란왕국(소말리아)에서 받은 기린을 묘사한 청나라의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

1415년 정화가 아주란왕국(소말리아)에서 받은 기린을 묘사한 청나라의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

『명사(明史)』에 따르면 정화의 함선 중 가장 큰 것은 길이 44장(丈·132m), 폭 18장(54m)에 이르렀습니다. 총 62척의 배에 2만7800명의 선원을 데리고 원정을 떠났습니다. 조금 과장이 있었다 해도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길이 18m, 승무원 40여명)보다 훨씬 컸던 것은 분명합니다.

만일 정화가 아프리카 서안을 돌아 포르투갈의 함선과 마주쳤다면, 혹시나 콜럼버스가 출항했던 스페인의 우엘바 항구에 먼저 도착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명이 대항해시대의 주인공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시 명의 국력은 세계 최강이었고, 근세 이전까지 중국은 한 번도 초강대국의 자리를 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앵거스 매디슨의 『매디슨 프로젝트』에 따르면 서기 1000년 중국의 인구(5900만 명)는 유럽 30개국을 합친 것(2556만 명)보다 많았습니다. 매디슨은 특히 1990년 물가를 기준으로 이 시대의 GDP 규모를 달러로 환산했는데(기어리-카미스 달러) 중국(274억 달러)이 유럽 30개국(109억 달러)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1500년에도 여전히 중국(618억 달러)이 유럽 30개국(441억 달러)을 압도했죠.

그러나 16세기 이후 두 문명은 역전됩니다. 1700년 유럽 30개국의 GDP(809억 달러)가 200년간 84% 늘어난 반면, 중국(828억 달러)의 성장률은 34%에 그쳤습니다. 1900년엔 유럽 30개국의 GDP(6739억 달러)가 중국(2181억 달러)의 3배나 됐고요. 50년 후엔 1조3962억 달러와 2449억 달러로 격차가 더욱 커졌습니다.

이처럼 16세기 이전까지 초일류 강대국이던 중국은 근세에 이르러 왜 병든 용이 됐을까요.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니덤 퍼즐’이라고 부릅니다. 영국의 과학사회학자 조지프 니덤은 중국의 저발전 원인을 ‘과학혁명의 부재’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조건이 중국과 유럽의 운명을 갈랐다”고 말합니다.

니덤은 종이·화약·나침반·인쇄술 등 4대 발명품을 만들어낸 중국의 과학기술이 15세기까진 유럽을 앞섰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서구의 비약적인 과학혁명을 중국이 따라가지 못했죠. 핵심 원인은 개방정책을 포기하고 쇄국정책으로 돌아선 데 있습니다. 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락제가 죽으면서 해외 원정사업도 덩달아 폐기됐죠.

개방정책 폐기로 과학 발전 더뎌

당시 명은 인력·자원이 풍부해 교역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특히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더 많은 군사·외교 자원을 할애하면서 해양정책이 뒷전으로 밀렸죠. 15세기 난징에서 북쪽의 베이징으로 천도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니덤은 “중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지 못했고,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체제와 유교 전통으로 자율과 개방성이 부족했다”고 진단합니다.

1000년간 유럽·중국의 경제규모 변화

1000년간 유럽·중국의 경제규모 변화

반면 유럽은 봉건제가 무너지고 르네상스에서 꽃핀 학문과 예술이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신항로 개척으로 다양한 문물을 교류하며 새로운 기술과 물자를 받아들였죠. 구질서의 해체와 시장의 확대는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높였고요. 이런 토양 아래 갈릴레이에서 뉴턴으로 이어지는 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과학은 이를 현실에 적용한 기술의 발전을 견인하며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고 무기를 발달시켰습니다. 기술과 군사력은 서구의 나라들이 훗날 제국주의로 치닫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죠. 그 때문에 영국의 역사가 허버트 버터필드는 “과학혁명은 종교의 출현 이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근대과학의 탄생』)이라고 평가합니다.

이처럼 중국과 유럽의 사례를 볼 때 과학혁명은 자율과 개방성, 다문화 같은 근대적 요소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과학혁명을 위해선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제이콥 브로노우스키(『과학과 인간의 가치』)의 말처럼 사상·비판의 자유, 이를 받아들이는 성찰적 지혜가 있어야 과학의 꽃을 피울 수 있죠.

같은 유럽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이 프랑스·독일을 치고 나간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1500년 네 나라의 1인당 GDP는 비슷했지만, 1600년 네덜란드(1381달러)는 프랑스(841달러)·독일(791달러)을 멀찌감치 따돌렸습니다. 1700년엔 2130달러로 프랑스·독일(910달러)의 2배를 넘어섰고요.

16·17세기 네덜란드의 급부상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고 해상 교역에 신경 썼기 때문입니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 경작이 어려웠던 네덜란드는 1579년 스페인에 독립선언을 하면서 여러 나라의 인재를 받아들입니다.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온 개신교도 중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고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과학·예술·학문의 꽃을 피웠습니다.

18·19세기 바통을 이어받은 나라가 영국입니다. 1215년 마그나카르타부터 일찌감치 민주주의의 싹을 틔워온 영국은 산업혁명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룹니다. 기술 혁신을 위해선 창의성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사회 전반에 다양성과 개방 정신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애덤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요람인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죠.

과학자까지 이념의 덫 씌워 적폐몰이

이처럼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성이 있어야 과학이 발전할 수 있고, 과학적 사고가 널리 퍼져 있어야 문명이 진보합니다. 네덜란드와 영국 모두 관용과 개방, 다양성의 정신을 존중하며 과학기술을 꽃피우고 선진국이 됐습니다. 눈부신 과학의 성과는 민주적 토양 아래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떤가요. 얼마 전 신성철 KAIST 총장이 정부의 무리한 고발로 20개월간 검찰 수사를 받다 무혐의 처분 됐습니다. 그는 지난 정권에서 임명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등학교 동문입니다. 처음부터 과학계는 “문재인 정부가 무리하게 적폐로 내몬다”며 반발했습니다. 당시 네이처도 “한국 과학자들이 부당한 처사에 저항하고 있다”고 지적했고요.

2018년 4월 임기 2년을 남기고 사퇴한 임기철 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은 “과기부 차관으로부터 ‘촛불 정권이 들어섰으니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임기를 못 채우고 그만둔 기관장만 12명입니다. 단지 지난 정권의 인사란 이유로 적폐 딱지를 붙여 내쫓는 것은 과거 유럽의 종교박해와 무엇이 다른가요.

과학자를 홀대하고, 원전과 같은 과학 정책조차 비과학적 결정을 내리는 풍토에선 기술 발전도, 경제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정치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필요합니다. 오직 이성과 논리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다양한 생각이 존중받을 수 있는 개방적 풍토에서만 창의성과 혁신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의 정치권은 얼마나 민주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하고 있을까요.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