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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권력자의 ‘선한 의도’ 누군가에겐 압제와 폭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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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국가란 무엇인가

등장인물·이론

사울

사울

사울
재위 BC 1037~1010년. 선지자 사무엘이 세운 유대 왕국의 첫 번째 왕. 양치기 소년이던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 후 사람들의 존경을 얻자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사무엘과 틀어진 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해 자살한다.

발생론 “국가는 필요악, 견제해야” #목적론 “목표 위해 개인 희생 가능” #성추행, 검찰 흔들기…권력 사유화 #“의회정치 무력화, 전체주의 비슷”

다윗

다윗

다윗
재위 BC 1010~970년. 유대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들은 솔로몬 왕이다. 블레셋의 전사 골리앗을 쓰러뜨려 영웅이 됐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다윗의 청년시절을 모델로 했다. 성서에선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적 국가관
국가는 고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론. 아리스토텔레스(사진)는 국가가 개인의 행복과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국가를 지배계급의 착취 도구로 본 마르크스의 유물사관도 목적론적 국가관의 일종이다.

로크

로크

발생론적 국가관
목적론적 국가관은 국가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고 본다. 권력의 주체는 시민이며, 국가는 그저 필요악일 뿐이다. 정치의 핵심은 국가의 권한을 견제하는 데 있다. 로크(사진) 등의 사회계약론이 대표적이다.

“너희의 아들을 전장에 내보내고 딸은 시종을 삼을 것이다. 양을 키우고 밭을 갈아 모두 바칠 것이며 끝내 종이 될 것이다. 그래도 왕을 원하는가?”

구약성경(사무엘기)에 기록된 선지자 사무엘의 예언입니다. 하늘에 왕을 내려달라던 유대인들의 기도에 대한 답변이었죠. 이들은 백성을 하나로 모아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한 지도자를 열망했습니다. 사무엘은 ‘자유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유대인들은 강력한 국가의 꿈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처음 왕이 된 이가 사울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성격이 오만하고 시기심이 커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습니다. 뒤를 이어 지혜로운 청년이 왕좌에 오르니, 바로 다윗입니다. 소년 시절 골리앗을 물리친 그는 인자한 성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의 치세는 아들인 솔로몬까지 이어져 유대 왕국의 전성기를 이룹니다.

구에르치노가 그린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1646년).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울은 백성들이 존경하는 청년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한다.

구에르치노가 그린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1646년).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울은 백성들이 존경하는 청년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한다.

이 이야기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무엘의 경고처럼 국가를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필요악’으로 보는 것이고요. 둘째는 다윗·솔로몬 같은 지혜로운 왕이 다스리며 국가가 ‘선한 의지’를 실현한다는 입장입니다. 두 국가관을 구분해 전자를 발생론, 후자를 목적론이라고 부릅니다.

목적론의 원조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정치학』에서 “국가의 목적은 인간의 선한 생활이며, 정치사회는 고결한 행동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시민 각자의 행복은 공동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므로, 국가 권력은 개인의 권리에 우선합니다. 그의 이론은 계몽시대 이전까지 서양철학을 지배합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교회만큼이나 무소불위의 지위를 누려 철학의 진보를 가로막았다, 17세기 이후 많은 사상들이 그를 공격하며 시작됐다”고 했습니다. (『서양철학사』)

선두에 섰던 이들이 사회계약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국가에 숭고한 목적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국가는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계약을 맺어 권한을 위임해 생겨났을 뿐”(홉스)이죠. 로크는 한발 더 나아가 민주주의 헌법의 원리인 국민주권론을 강조했습니다. 국가 권력은 국민이 만들어 놓은 원칙, 즉 법에 의해서만 행사돼야 하며(법치주의) 만일 국가가 주권자의 의사에 반하면 사회계약을 해지할 수(저항권) 있습니다. (『통치론』)

로크의 이론은 몽테스키외로 이어져, 삼권분립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그는 입법·행정·사법 세 기관의 견제와 균형이 바탕 된 대의정치야말로 이상적 정치체제라고 봤죠. (『법의 정신』) 그의 사상은 미국 독립혁명의 근본이념이 됐고, 최초의 삼권분립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깬 사회계약론

선지자 사무엘의 유년을 묘사한 그림. 조슈아 레이놀즈 ‘어린 사무엘’(1776).

선지자 사무엘의 유년을 묘사한 그림. 조슈아 레이놀즈 ‘어린 사무엘’(1776).

이처럼 국가의 존재 이유는 목적론에서 시작해 발생론으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역사 발전의 주체를 ‘국가’에서 ‘시민’으로 바꿔 놓은 것과 같습니다. 시민의 권리를 강조한 미국 헌법의 첫 문장이 ‘We the People(우리 시민들)’로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근대 이후 개인은 권력의 객체가 아니라 분명한 주체로 우뚝 섰습니다.

그러나 유교 전통과 공동체 이데올로기가 공고한 한국사회에선 목적론적 국가관이 여전합니다. K방역의 성공이 대표적인 예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사생활을 생명처럼 중시하는 서구에선 한국식 모델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독일의 슈피겔지는 K방역은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한 유럽에선 도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논평하기도 했죠.

물론 목적론적 국가관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탁월한 정치인’이 전제돼야 하죠. 국가에 ‘선한 의도’라는 인격을 부여하는 순간 통치자에게 지나친 권력이 집중되는데, 이때 통치자의 철학과 역량에 따라 ‘선한 의도’가 다른 누군가에겐 압제와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와 ‘절제’ 같은 정치가의 공적 역량이 시민보다 월등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조선의 사대부가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통해 수신제가(修身齊家)에 힘쓴 것도, 어린 왕세자를 경연을 통해 성군으로 길러내려 한 것도 같은 이유였죠.

그러나 현 집권세력은 선한 의도로 국가의 광범위한 개입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정치인에게 필요한 공적 역량은 부족합니다. 정의의 기준부터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기편이냐 아니냐’에 놓여 있죠.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정권의 실세들을 수사할 때는 성인처럼 떠받들다가, 대통령의 지시대로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했더니 만고의 역적으로 몹니다. 상대 정파의 조그만 흠집까지 적폐로 몰 때는 언제고, 조국·윤미향 사태에서 드러난 각종 편법과 범죄 의혹에 대해선 눈감습니다.

공사를 구분하는 절제 역량도 부족합니다. 공화국(republic)은 라틴어 ‘공적인 것(res publica)’에서 유래했습니다. 공화국의 리더는 높은 공공의식으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자신은 다주택자이면서 남들에게 집을 팔라고 하거나(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 투기세력을 비판해놓곤 재건축에 투자하면서(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정당성을 잃었습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조국에게 ‘마음의 빚’을 표명한 일도 공사 구분을 못했기 때문이죠.

말로는 ‘선한 의도’ 행동은 ‘편 가르기’

특히 최근 여당 지자체장들의 위계에 의한 성폭력 사건은 시민이 부여한 공적 권한을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데 불법적으로 사용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런데도 여권은 이를 옹호하는 듯한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미화 발언은 진실을 은폐하고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합니다. 내 편이면 무조건 감싸주는 특유의 ‘내로남불’ 정의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죠.

문명의 발전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식 국가관이 사회계약론으로 발전한 것은 통치자의 역량에 온 사회를 맡기는 것의 기회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역사엔 늘 세종 같은 성군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설령 최고 권력자가 높은 수준의 정의와 절제 역량을 갖고 있다 해도 그를 보좌하는 정치인까지 같다고 볼 순 없습니다.

반면 ‘국가=필요악’이고 개인을 권력의 주체라고 가정하면, 정치인은 시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일 뿐입니다. 시민은 주기적으로 대표를 교체하고 일상에서 비판적으로 정치인을 견제합니다. 이렇게 하면 권력자의 복불복 문제도 해결되며,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국가의 횡포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로크(국민주권)와 몽테스키외(삼권분립)의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것이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의회정치를 강화하고 시민의 역량을 높이는 일입니다. 국민의 대표인 의회, 특히 야당을 건너뛰고 지지자들만 등에 업고 독주하는 ‘직거래 정치’를 견제해야 합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지적처럼 “다원적 체제인 대의민주주의 대신 직접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해하고, 모든 인민을 다수의 ‘총의(總意)’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강조했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도 필요합니다. 정치인에 대한 팬덤으로 맹목적 애정만 보낼 게 아니라 비판적 지지를 할 수 있어야 하죠. 과거 그의 집권 후 ‘노감모(노무현을 감시하는 모임)’로 역할을 바꾼 비판적 시민들처럼 말입니다. 현재 좌우 양극단의 지지자들처럼 ‘깨어있기’보다 ‘조직된 힘’에만 비중을 싣는 것도 지양해야 합니다.

얼마 전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피해자는 “거대 권력 앞에서 공정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호를 바랐던 정부·여당으로부터 또 다른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80년대 국가의 폭력에 맞서 제일 앞장서 싸웠던 그들에게 ‘국가란 무엇인지’ 되묻습니다.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