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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이 도착했고 아팠다" 영시로 위안부 증언한 29살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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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에 맞춰 귀국한 후 자가격리 기간에 화상으로 기자간담회를 연 시인 에밀리 정민 윤. [연합뉴스]

출간에 맞춰 귀국한 후 자가격리 기간에 화상으로 기자간담회를 연 시인 에밀리 정민 윤. [연합뉴스]

“소녀들이 도착했고 아팠고 임신했고 수많은 주사약을 /맞았고 이름 없는 짐승들이/우리를 깔아뭉갠 채 폭발했고”
시인 에밀리 정민 윤(29)의 ‘증언들’ 중 일부다. 에밀리 정민 윤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책, 특히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담은 도서와 녹취 텍스트를 사용해 시를 썼다. ‘증언들’은 현재 대부분 고인이 된 위안부 할머니 7명의 증언을 담은 연작시다. 시인이 취사선택한 시어들은 담담한만큼 생생하고 고통스럽다.

열 살에 캐나다로 이주해 현재 미국에 살고있는 시인은 영어로 위안부의 이야기를 썼다. ‘증언들’을 비롯한 ‘일상의 불운’ ‘위안‘ ’나를 만지지 마라‘ 등의 작품들이 담긴 에밀리 정민 윤의 데뷔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A Cruelty Special to Our Species)』은 2018년 미국의 하퍼콜린스 출판사에서 나왔다.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는 “그의 시를 통해 고통은 소통 가능한 것이 된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마음을 찢어놓는 데뷔작”이라고 평했다. 출판사 열림원에서 출간한 한국어 번역본은 이달 10일 나왔다.

13일 오전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에밀리 정민 윤은 유창한 한국말로 “이 책이 반일 민족주의적으로 읽히는 걸 원치 않는다”며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을 중심에 뒀지만, 아시아계 여성들, 또 현대 여성들의 경험을 감싸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작품들은 전쟁의 폭력, 인종 차별, 언어의 벽이 낳는 인간의 고통에 주목한다.

독특한 것은 텍스트가 종이 위에 인쇄돼 있는 방식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은 한 문장을 한번에 읽기가 쉽지 않다. 행이 여러번 바뀌는 것은 물론이고 소절과 소절 사이에 길고 잦은 띄어쓰기로 공백을 뒀다. “여백을 많이 쓰고 싶었다. 이 작품을 읽을 땐 여백 때문에 말을 끊거나 더듬게 된다. 읽기 경험도 불편하게 만들어 내용과 연결시키고 싶어 이렇게 설계했다.” 이렇게 그는 증언을 단순 복제하지 않고 자신의 시로 바꿔냈다.

에밀리 정민 윤은 이같은 작업을 ‘찾은 시(found poetry)’로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생경한 유형인데 시각 예술의 콜라주와 비슷하다. 존재하는 텍스트를 부분적으로 이용해 새로운 형태나 내용의 시를 만든다.” 그는 “이 기법을 쓰면서 증언자들의 트라우마를 반복시키거나 이야기를 훼손하지 않을지 두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작품을 완성해야겠는 확신을 스스로의 정체성에서 찾았다. “미국인 친구들은 한국어를 하고 위안부 역사를 아는 여성, 그러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이야기를 쓸 수 있겠느냐고 했다. 용기를 가지고 썼다.”

에밀리 정민 윤은 2002년 캐나다로 이주했고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다. ‘증언들’을 비롯한 작품들은 뉴욕대에서 문예창작 석사 과정에 재학하던 22~24세에 초안을 완성했다. 그는 서문에서 “완곡한 표현인 ‘위안부’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미국에 많이 없다는 것을 알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쓰기 시작한 뒤 멈출 수 없게 됐다”고 했다. 또 한국어판 출간과 관련해 “한국에서는 적어도 위안부 역사를 새로 알리는 일이 필요하지 않지만 ‘알림’이 아닌 ‘지속시킴’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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