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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호정의 왜 음악인가

왼손만으로 치는 피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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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호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왜 하필 오른손을 다친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많을까. 오스트리아의 명 피아니스트였던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오른팔을 잃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동갑 피아니스트 두 명도 오른손 부상을 입었다. 1928년생인 개리 그라프만과 레온 플라이셔다. 열 살도 되기 전부터 무대를 휩쓸었던 그라프만은 50대에 오른손 넷째, 다섯째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플라이셔는 30대에 오른손이 펴지지 않는 희귀한 질병이 시작됐다. 미국의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73)도 40대에 오른손 엄지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독일에서 로베르트 슈만이 오른손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다.

물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들 덕에 피아노에서 왼손의 세계가 대폭 확장됐다. 오른팔이 없는 상황에서도 연주를 계속해야 했던 비트겐슈타인은 라벨과 프로코피예프에게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의뢰했다. 지금도 종종 연주되는 곡들이다. 피아니스트는 왼손 하나로 거대한 오케스트라에 대항하며 끝까지 무대에서 살아남는다.

전성기에 오른손 부상을 당했던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 [중앙포토]

전성기에 오른손 부상을 당했던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 [중앙포토]

그라프만은 미국의 영민한 작곡가 윌리엄 볼컴에게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부탁했다. 게다가 왼손 하나가 아닌, 두 왼손을 위한 곡이다. 피아노 두 대를 왼손만 쓰는 피아니스트 두 명이 각각 연주하고 오케스트라가 함께한다. 1996년 이 곡을 초연할 때 그라프만은 플라이셔와 함께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볼컴은 동양의 타악기인 공을 오케스트라에 포함시키고 두 피아노와 함께 소리를 울려내도록 했는데 마지막 부분은 맹렬히 돌진하는 왼손의 음악을 공이 포용하며 끝난다. 당시 볼티모어 선은 이 부분이 마치 부처의 자비를 상징하는 듯하다고 평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피아니스트가 경력을 무사히 이끌어가려면 정말이지 부처님의 자비가 필요할 정도다. 결국 몸을 쓰는 직업을 선택한 모든 음악인이 그렇다. 흔한 부상으로 오른손을 다치거나 쓸 수 없게 된 피아니스트들의 행보를 보면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어떻게 해서든 무대에 서는 것. 온갖 치료를 받고 새로운 곡을 의뢰해 만들어냈다. 두 손 피아니스트로 돌아왔다가, 다시 상태가 나빠져 한 손으로 연주를 이어가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두 손으로 베토벤·브람스·슈베르트의 일인자로 칭송받다가 한 손으로 무대에 서고, 다시 두 손, 한 손, 결국 두 손으로 돌아왔던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가 2일(현지시간) 미국 볼티모어에서 세상을 떠났다.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곡들을 모아 들으며 그를 추모해본다. 양손으로 연주하는 곡보다 더 현대적으로 들린다. 오른손보다 약한 왼손이 마음 놓고 강해질 기회이기도 하다. 태생적으로 약한 신체를 가진 인간은 부상으로 뜻밖의 예술을 발견하기도 한다.

김호정 문화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