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복부인 '빨간바지'를 입은 듯"…'부동산 오페라'가 그린 욕망

중앙일보

입력 2020.08.12 15:16

대본가 윤미현(왼쪽)과 작곡가 나실인이 오페라 '빨간바지'의 무대 모형과 함께했다. 1970년대 개포동을 그리며 한국인의 부동산 욕망을 이야기한다. 김성룡 기자

대본가 윤미현(왼쪽)과 작곡가 나실인이 오페라 '빨간바지'의 무대 모형과 함께했다. 1970년대 개포동을 그리며 한국인의 부동산 욕망을 이야기한다. 김성룡 기자

“지금 이 판국에 필요한 건 땅이야. 양심은 흰 쌀밥에 잘못 들어간 돌멩이 같은 거야.”
“출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땅 투기야. 땅 투기는 도둑질도 아니고 사기도 아니잖아.”
“버스 토큰 하나로 아파트 세 채를 만든다는 빨간바지 흉내를 내고 싶은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닐 테니깐.”

국립오페라단 신작 '빨간바지' 작곡가 나실인, 대본가 윤미현

오페라도 부동산을 건드린다.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의 가사, 대사가 땅과 집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그리고 있다. 용감하게 부동산 문제를 들고 나온 국립오페라단의 신작 ‘빨간 바지’. 빨간 바지는 1970~80년대 한창 개발되던 강남 땅의 딱지를 모아 재산을 뻥튀기한 나팔바지 복부인들을 은유한다. 작곡가 나실인(41)과 대본가 윤미현(40)이 만든 작품은 이달 28ㆍ29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배경은 1970년대 강남구 개포동이다. 빨간 바지로 유명한 주인공, 복부인이 되고 싶은 가난한 여인, 이들을 각자의 목적대로 이용한 인물들이 얽힌다. 모두의 공통점이 있다면 욕망의 끝에 부동산이 있다는 것. 현 시점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키워드가 3막짜리 오페라에 들어가 있다.

작곡가와 대본가는 “지금 부동산만큼 모든 사람의 이야기인 소재는 찾을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땅과 아파트를 많이 가진 사람, 가지고 싶어했던 사람들 모두가 결국 손에 쥔 것 없이 끝나는 결말을 만들었다. 대본가 윤미현은 “70년대와 지금이 똑같다. 모든 계층의 모든 사람이 부동산을 보고 달려가지만 욕망을 위한 욕망일 뿐 실체가 과연 있는 걸까 질문하고 싶었다”고 했다. 작곡가 나실인은 “집을 스무채 가진 사람도, 월세를 사는 사람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이 편해지게 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사실 이들이 작품은 완성한 건 부동산이란 주제가 지금보다는 덜 뜨거웠을 때다. ‘빨간바지’는 본래 올 3월 공연 예정이었다가 코로나19로 연기됐다. 대본 초고는 지난해 여름, 전체 악보는 올 1월에 완성했다. “70년대 개포동 흙바닥의 비닐하우스를 밀어내고 아파트를 짓는 부동산 이야기였는데 마치 2020년 8월 대한민국의 인간들을 그려낸 것처럼 됐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오페라 '빨간바지' 무대 디자인. [사진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빨간바지' 무대 디자인. [사진 국립오페라단]

부동산이라는 아이디어는 작곡가가 냈다. “그동안은 조선시대와 근대를 다루는 오페라를 썼다. 하지만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의 스토리보다 부동산 이야기가 지금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에게 부동산은 마치 배고픔 같은 일차적 욕망이다.”(나실인) 작품 구상 단계에서 작곡가의 아이디어를 들은 윤미현은 쾌재를 불렀다. “서울 용산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강남 개발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파트 스무채를 사들여 부를 이룬 사람 스토리도 들었다. 사회 부조리에 관심이 많던 중2 때 시를 하나 썼는데 제목이 ‘복부인이 되고 싶어라’였다. 부동산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작곡가 제안을 듣고 ‘앗싸’ 했다.”

작곡가는 “잘 생긴 남자 주인공이 개포동 비닐하우스촌 출신이고, 재개발될 때 복부인의 눈에 띄어 정부가 된다는 내용이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대본가에 했다. 대본에서는 남자 주인공의 첫 사랑인 여주인공이 더해졌다. 역시 비닐하우스촌 출신인 가난한 여주인공은 복부인을 꿈꾼다. 대출을 받아 땅을 사고, 그 땅값이 올라 대출을 갚고, 그렇게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작품은 부동산에 대한 욕망을 재단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막에 나오는 삼중창 ‘빨간 바지로 농사를 짓는’은 작곡가가 작품 전체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설명한 노래다. “땅 속에 감자를 심듯 아파트를 심어 버리는”과 같은 가사로 부동산 투기를 경작에 빗댄다. “옛 사람들이 땅에 농사를 지었다면 현대의 우리에겐 아파트가 경작물이다. 열매가 열리면 시장에 내다 파는.”(윤미현)

대신 이 욕망이 얼마나 일반적이고 본능적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나실인은 “작품을 위해 여러 자료를 조사했을 때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욕망과 갈증을 느낀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막간극에 12중창의 여성합창을 넣었다. 모두가 빨간 바지를 입고 부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부동산을 탐하며 함께 달려가는, 초식동물의 초원 질주를 연상시키는 노래를 썼다.”

작품의 장르는 ‘코믹 오페라’다. 나실인은 “사실 부동산 이야기를 코믹 오페라로 만들기 위해 특별히 노력해야할 일은 없었다”고 했다. 윤미현은 “70년대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지금을 다시 보면서 인간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작품”이라고 했다. 개발지역의 흙바닥에 끝단이 닿지 않도록 펄럭였던 빨간 바지를 설명하며 윤미현은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빨간 바지가 훨씬 많아져 모든 시민이 그 옷을 입고 있다는 게 아닐까”라고 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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