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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한복판 ‘묻지마 폭행범’ 불구속…법조계 “무죄추정 원칙”

중앙일보

입력

서울역에서 30대 여성을 상대로 '묻지마 폭행'을 저지른 남성 이모(32)씨가 지난 6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청사를 나서고 있다. 뉴스1

서울역에서 30대 여성을 상대로 '묻지마 폭행'을 저지른 남성 이모(32)씨가 지난 6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청사를 나서고 있다. 뉴스1

경찰이 최근 강남 한복판에서 발생한 '묻지마 폭행' 가해자를 불구속 입건해 수사하자 논란이 일고 있다. 피해자 안전과 추가 범죄를 우려하는 측면에서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지난 8일 0시 40분쯤 강남구 논현역 인근 대로변에서 지나가던 여성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달아난 30대 남성 A씨를 10일 불구속 입건했다. 피해 여성은 12일 현재까지 5명으로 드러났다. 경찰 조사에서 A씨는 "폭행 당시 술에 취한 상태였다"며 우발적 범행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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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에는 30대 남성 B씨가 서울역에서 처음 보는 여성을 주먹으로 때린 묻지마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법원은 B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2차례 연속 기각했다. 법원은 "피의자 주거가 일정하고, 기록과 심문 결과에 의해 확인되는 사정을 종합해보면,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여성 대상 범죄에 관대하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여성 혐오의 기인한 무차별적 범죄라기보다 피의자가 평소 앓고 있던 조현병 등에 따른 우발적ㆍ돌출적 행위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당시 B씨를 체포한 철도경찰은 "피의자가 (범행 당시) 불특정 다수에게 비정상적 행동을 해 '제2의 피해자' 방지를 위해 신속 검거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거창군 거창읍에서도 남성 C씨가 길을 가던 20대 여성을 폭행해 망막이 손상되고 얼굴 뼈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법원은 C씨에 대해 "거주지가 명확하고 조사에 응하는 등 도주 우려가 없다"며 구속영장을 2차례 기각했다. 피해자 부모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린 글에서 "가해자가 주변에 있는 한 피해자와 가족은 불안 속에 살아야 한다"며 "가해자의 인권이 피해자의 인생보다 중요하냐"고 말했다.

지난 8일 강남 논현역 인근에서 모르는 여성의 얼굴을 아무 이유 없이 주먹으로 때린 남성이 달아나는 모습. [독자 제공]

지난 8일 강남 논현역 인근에서 모르는 여성의 얼굴을 아무 이유 없이 주먹으로 때린 남성이 달아나는 모습. [독자 제공]

가해자를 불구속 수사하는 데 대해 피해 여성들은 보복 행위 등 2차 피해를 우려하며 불안을 호소한다. 경찰 관계자는 "범행 동기가 뚜렷하지 않은 묻지마 폭행의 경우 가해자가 언제 또 범죄를 저지를지 모른다. 피해자가 혹시 모를 가해자의 보복 행위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대안으로 실질적인 신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국회에서 "서울역 묻지마 폭행사건 기각 사유를 읽어봤을 때, 국민이 이해하겠나"라며 "(불구속 상태로) 보복 폭행을 하면 누가 책임지냐"고 지적했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으면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타당한 사유가 있더라도 불구속 수사하는 게 ‘무죄 추정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입장이다. 구속은 최후의 수사 수단인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대한변호사협회 관계자는 "수사 시점에서는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라며 "특히 자진 출석했을 경우 도주 우려가 없다는 거로 판단되고, 피해자가 중상에 이르지 않을 경우 범죄가 중대하지 않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다. CCTV에 폭행 장면이 잡힌 경우에도 증거 인멸 우려가 약하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구속은 징벌적 개념보다 수사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며 "구속하지 않더라도 징벌 성격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교도소 복역을 할 수가 있으니 두 가지를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묻지마 폭행'이란 틀에서 보기보다 사건별 범죄 중대성을 고려해 구속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혜림 기자 kwon.hye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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