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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8·15 특별기고

한·일 지도자, 큰 판을 보고 역사 문제를 극복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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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 이사장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 이사장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지는 가운데 미·중 대립이 격화하면서 미·소 냉전 대결 이래 세상이 가장 불안정해지고 있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려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매일 실감한다.

징용판결 뒤 양국, 양보 없는 대립 #젊은 세대에 ‘보복 대물림’ 말아야

하지만 동시에 나는 확신한다. 확고한 ‘미들 파워(Middle power)’인 일·한 양국이 협력한다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대해서도, 미·중 긴장을 제어하는 데서도 우리 일·한 두 나라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의 일·한 관계는 전혀 반대로 가고 있다. 한국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과 관련, 주한 일본 기업의 자산을 압류하기 위해 대구지법 포항지원이 내놓은 공시송달의 효력이 지난 4일부터 발생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 각료들은 압류자산을 현금화할 경우 제재하겠다는 발언만 쏟아내고 있다. 한국 정부도 이 문제를 일·한 대화로 해결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단 1mm라도 타협을 거론하면 상대방에게 진다’는 식의 태도는 양측이 외교를 포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재팬 퍼스트’와 ‘코리아 퍼스트’가 충돌한 채 일·한 관계는 파멸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냉정해져야 한다. 오늘의 일·한 관계는 윈윈은 말할 것도 없고 제로섬(Zero-sum) 게임도 되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측이 이미 사실상의 경제 제재를 하고 있지만, 한국 측도 보복만 하고 있다.

일·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상대방에 대한 제재가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기는 어렵다. 양측 경제에 나쁜 영향만 줄 뿐이다. 일·한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얘기도 틈틈이 나온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일본에 조금 불이익이 생긴다고 해도 분풀이 말고는 서로 이득이 될 게 없다. 내셔널리즘의 덫에 걸려 서로 으르렁거리고, 미·중 틈바구니에서 떠도는 일·한의 모습을 볼 때마다 세계는 우리를 냉소할 게 틀림없다.

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 일본 측 입장은 “1965년 일·한 청구권협정에 따라 해결이 완료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징용 피해자 재판 자체에 놀랐고 대법원 판결이 났을 때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일본인이 많았다.

반면 한국에서는 개인의 청구권이 국가 간 조약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다고 생각돼 재판이 진행됐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도 과거 “개인의 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에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하고 있으며, 현재 국제인권법의 개념은 “개인의 배상권을 국가 간의 협정이나 조약에 의해 소멸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 주류다.

사정이 이쯤 된 이상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큰 판을 보는 대국관(大局觀) 을 갖고 기존 입장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해야 한다.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지금 새로운 일·한 협상을 벌이는 일이 한국 정부로서는 쉽지 않음을 나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도 대국관에 입각해 고도로 정치적인 판단을 하기 바란다.

감정싸움이 심각한 점을 고려하면 일·한 정부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가져가기로 합의하거나, 제3국을 통한 중재 형식을 취하는 방식을 검토해도 좋다. 협상에 들어가기로 결정되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사실상의 제재를 그 시점에서 모두 해제해야 함은 물론이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 지배했다는 역사적·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믿고 이와 관련해 일관된 발언을 해왔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가 끝난 후 75년이 지나 일·한 양측에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대로 일·한 관계를 악화시키고 그것을 ‘또 하나의 역사’로 삼아 양국의 새로운 세대에 물려주는 어리석음을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한 쌍방에 똑같이 부과된 책임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