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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은의 야野·생生·화話] '당신의 레전드'는 은퇴 투어를 할 수 있을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LG 박용택이 2018년 6월 KBO 리그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달성한 뒤 기념 꽃다발을 들고 팬들에 인사를 건네고 있다. [연합뉴스]

LG 박용택이 2018년 6월 KBO 리그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달성한 뒤 기념 꽃다발을 들고 팬들에 인사를 건네고 있다. [연합뉴스]

프로야구 LG 트윈스 박용택(41)은 '원 클럽 맨'이다. 2002년 LG에 입단해 19년간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 지난해 1월 LG와 2년간 계약을 연장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LG 선수로 명예롭게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LG는 암흑기가 유독 길었던 팀이다. 끊임없이 팀을 리빌딩하느라 베테랑 선수를 여러 차례 정리했다. 박용택은 그 모든 태풍 속에서 버텨냈다. 늘 팀의 간판이자 주전으로 살아남았다. 2018년엔 양준혁을 넘어 KBO리그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다. 지금 박용택이 때려내는 안타 하나하나가 모두 신기록이다.

십수년간 한 팀에서만 뛰는 선수가 점점 희귀해지는 시대다. 한 팀의 전통과 역사를 품은 '레전드'(전설)는 그래서 더 귀한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 메이저리그의 문화를 그대로 가져온 '은퇴 투어'도 결국은 '전설을 전설로서' 예우하기 위한 이벤트다. 특히 스스로 자신의 은퇴 시점을 지정하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긴 선수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동안 은퇴 투어의 영광을 누린 KBO리그 선수는 2017년 이승엽과 이호준이 전부였다.

그다음 순번이 될 것 같았던 박용택의 '은퇴 투어'를 놓고 뜻밖의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LG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각 구단에 '박용택 은퇴 투어' 협조를 요청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다. 다른 구단 일부 팬이 반기를 들었다. "박용택은 LG 구단의 레전드일 뿐, 국가대표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이승엽과는 다르다. 은퇴 투어를 하기엔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논란이 불거지고 공론화된 순간, 박용택의 은퇴 투어는 이미 빛이 바랬다. 20년 가까이 뛰면서 리그에서 가장 많은 안타를 때려낸 현역 최고령 선수가 'LG의 레전드'라는 프레임에 갇혔다. 은퇴 투어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구단과 선수 모두 마음에 짐과 상처를 떠안았다.

이 부담은 LG와 박용택에게만 지워진 것도, 여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은퇴하게 될 두산 베어스의 레전드, KIA 타이거즈의 레전드, 롯데 자이언츠의 레전드 등등 다른 모든 구단의 레전드가 똑같은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당신은 은퇴 투어를 할 자격이 있는가.' 이 애매한 질문이 각 구단 프랜차이즈 스타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가게 됐다.

뉴욕 양키스의 최장수 캡틴 데릭 지터는 2014년 은퇴 투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숙적' 보스턴 홈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AP=연합뉴스]

뉴욕 양키스의 최장수 캡틴 데릭 지터는 2014년 은퇴 투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숙적' 보스턴 홈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AP=연합뉴스]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는 100년을 훌쩍 넘긴 앙숙이자 숙적이다. 보스턴 팬에게 양키스 전 마무리투수 마리아노 리베라는 최악의 선수였다. 양키스 리베라의 등판은 곧 보스턴의 패배가 굳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양키스의 주전 유격수였던 데릭 지터도 그들에겐 원수나 다름없었다. 지터는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캡틴으로 인정받았다.

그렇게 이를 갈았던 보스턴의 극성팬들조차 리베라와 지터의 마지막 보스턴 원정 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선수에게 야유가 아닌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 적을 인정하고, 아름답게 떠나 보냈다.

야구는 기록으로 승부를 가리지만, 기억으로 전설을 만든다. 자신의 레전드가 존중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다른 이의 레전드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은퇴 투어'라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것이 전설을 예우하는 순리다.

배영은 야구팀장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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