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술 덕후들이 먼저 찜했다, 설치작가 시오타 치하루 전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시오타 치하루, 'Between Us' 전시장 전경. [가나아트]

시오타 치하루, 'Between Us' 전시장 전경. [가나아트]

  "(전시) 오픈했다는 소식에 바로 달려 갔다 왔어요" "기다렸다. 오픈하자마자 총총총" "보다가 눈물 날 뻔"···.

가나아트 두 곳, 인천파라다이스 #지난해 모리미술관 66만명 관람 #혈관 상징 붉은 실로 공간 엮여 #삶과 죽음, 관계 성찰하는 주제

일본 출신의 설치미술가 시오타 치하루(Shiota Chiharu·48)의 개인전 'Between Us(비트윈 어스)'전시 열기가 뜨겁다. 이달 18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와 한남동 가나아트 나인원 두 곳에서 전시를 열자마자 관람객들의 발길이 줄 잇고 있다. 지난 25일엔 200명, 26일엔 300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평일 하루 평균 20명 수준이던 관람객은 150~170명 정도가 찾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치하루의 설치 작품은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에서 5일 개막한 5인 현대미술작가의 단체전 'OH! MY CITY 오!마이시티'에서도 선보이고 있다.

'치하루 열기'는 컬렉터들의 구매 경쟁으로 먼저 드러났다. 가나아트 나인원에서 선보인 20점은 오픈하기 전에 거의 모두 판매됐고, 평창동의 전시작 50여 점 중 규모가 큰 일부 작품만 제외하고 모두 팔려나간 상태다. 이정용 가나아트 갤러리 대표는 "전시를 앞두고 주요 고객들에게 작품 목록이 공개되자마자 순식간에 주문이 쇄도했다"며 "예상보다 반응이 뜨거워 놀랐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치하루는 앞서 열린 몇몇 전시를 통해 이미 작가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는 관람객이 적지 않다"며 "드로잉과 조각, 작은 설치 작품은 작가의 지명도에 비해 가격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어서 컬렉터들이 더 몰린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섬뜩하고 우아하고···

시오타 치하루, 'Between Us' 전시장 전경.[가나아트]

시오타 치하루, 'Between Us' 전시장 전경.[가나아트]

시오타 치하루, ' Between U' 전시장 전경. [가나아트]

시오타 치하루, ' Between U' 전시장 전경. [가나아트]

시오타 치하루, In the hand, 2020, Bronze, brass wire, 32x26x28cm.[가나아트]

시오타 치하루, In the hand, 2020, Bronze, brass wire, 32x26x28cm.[가나아트]

치하루는 '실의 작가'로 불린다. 드로잉과 조각을 만들기도 하지만 가느다란 털실을 가지고 엮는 설치 작업이 대표적이다. 메탈 프레임에 실을 엮는 작업으로 작은 설치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드넓은 전시장을 통째로 활용해 '공간'을 엮는 작업이 특히 유명하다. 규모가 큰 전시장에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키는 실로 만들어낸 그의 작품은 섬세하면서도 웅장하고, 섬뜩하면서도 우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치하루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작가로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았고, 지난해 독일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과 일본 도쿄 모리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모리 미술관 전시를 찾은 관람객 수는 66만 명에 달했을 정도로 화제였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영혼의 떨림'(모리미술관 공동기획)을 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관람객을 만나지 못하고 막 내렸다.

삶과 죽음, 그리고 얽히고설킨 관계  

인천파라다이스시티에서 전시중인 시오타 치하루의 설치 작품.[인천파라다이스시티 아트스페이스]

인천파라다이스시티에서 전시중인 시오타 치하루의 설치 작품.[인천파라다이스시티 아트스페이스]

창틀, 의자, 침대, 여행 가방, 열쇠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활용한 치하루의 작품엔 삶의 유한함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다는 평을 받는다. 어릴 때 목격한 이웃집 화재에 대한 기억, 어린 시절 할머니 무덤을 보고 느낀 공포, 두 번의 암 투병으로 마주한 죽음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작품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시오타 치하루, State of Bein(메탈 프레임, 열쇠, 실), 20x20x20cm.[가나아트]

시오타 치하루, State of Bein(메탈 프레임, 열쇠, 실), 20x20x20cm.[가나아트]

이번 전시작 중 여러 개의 열쇠를 작은 메탈 프레임의 박스 안에 실로 엮어놓은 작품 '존재의 상태(State of Being)'도 그 중 하나다. 작가가 베를린 유학 당시 이용했던 현관 열쇠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부유하는 듯한 현대인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지며 쓰였을 열쇠는 서로 다른 시기에 한 공간 안에 머무르고 떠난 숱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대형 설치작업 '우리들 사이(Between Us, 2020)' 다. 가나아트센터의 2층 전시장 전체 300㎡의 공간에 30개의 낡은 의자를 놓고 실로 붉은 실로 엮은 이 작품은 독일에서 파견된 스태프 2명을 포함해 총 8명이 하루 8시간씩 꼬박 12일에 걸쳐 완성했다. 가나아트 전시기획에 참여한 김선희 전 부산시립미술관장은 "각 의자는 사적인 존재를 의미하지만 이것이 여러 개 놓이면서 그 의미는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 됐다"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한때 자리를 점했다가 사라지는 존재, 그리고 서로 관계를 맺고 사는 우리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실을 붓처럼 사용하는 작가 

치하루는 어떻게 실을 가지고 작업하게 됐을까. 오사카 출신으로 교토 세이카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1996년 독일 유학을 떠나 함부르크 조형대학, 브라운슈바이크 예술대학 등지에서 공부했다. 처음엔 화가를 꿈꿨던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유학 시절 꾸었던 어느 날 밤의 이상한 꿈이었다고 한다. "내가 평면 그림의 일부가 된 꿈에서 물감으로 뒤덮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는 그는 이 경험 이후 그림을 그리는 대신 실을 가지고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치하루는 아트·디자인 전문매체 디자인붐과의 인터뷰에서 "실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나는 비로소 무한의 우주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며 "내가 실로 만들어내는 선들은 캔버스 속의 붓놀림과 같다"고 말했다. 회화의 한계에서 벗어나고팠던 그에겐 실이 붓 역할을 하는 셈이다.

작업실의 시오타 치하루. [가나아트]

작업실의 시오타 치하루. [가나아트]

일상의 사물을 가지고 존재와 부재, 흔적과 기억 등의 주제에 천착했던 그의 작업엔 최근 혈관, 세포, 피부 등을 연상시키는 작품이 늘고 있다. 최근 부쩍 많이 사용하는 붉은 실도 생명체 안의 혈관을 연상시킨다. 김선희 전 관장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던 시기의 고민을 보여준다"며  "그의 작업 하나하나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우리의 생명과 존재에 대한 서사시"라고 말했다. 가나 나인원 전시는 8월 2일까지, 평창동 전시는 8월 23일까지, 인천파라다이스호텔 아트스페이스 전시는 10월 4일까지다.

이은주 기자의 다른 기사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