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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의료 포럼] 포스트 지놈시대 허와 실

중앙일보

입력

21세기 최대 화두는 지놈이다.

인체지놈사업을 통해 인간의 유전자가 99% 밝혀지면서 질병치료는 물론 사사오가 철학 ·문화 등 인간의 본질마저 지놈으로 해석하려는 유전자 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지놈 혁명 역시 극단적 예찬론보다 옥석을 가려 수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본지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중아의료포럼을 통해 지놈 혁명의 문제점과 이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한다.

유전자는 과연 인류에게 전지전능한 복음으로 다가올 것인가. 전문가들의 시각은 일단 회의적이다.

서울대 의대 이윤성 교수는 "1932년 독일에서 세포 안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전자현미경이 등장했을 때 많은 의사가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단꿈에 젖은 적이 있다" 며 "지놈정보 역시 실제 의료현장에서 질병치료로 연결되려면 장구한 세월이 걸릴 것" 으로 예측했다.

'유전인가 환경인가' 란 해묵은 질문에도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 '비흡연자 폐암' 유전적 요인 크지만 일란성 쌍둥이도 환경따라 달라져
지놈혁명 과신보다 금연·운동 더 중요

지놈혁명은 유전자 우위론자의 손을 들어준다. 평생 담배를 피워도 장수하는가 하면 담배 한 모금 물지 않은 사람도 폐암에 걸린다는 것이다.

실제 호흡기 점막에서 담배연기 속의 유해물질을 대사시키는 효소는 유전적으로 결정된다. 이들 효소를 합성하는 유전자가 없는 경우 담배연기에 훨씬 취약하다.

범죄자의 흉포한 성격도 유전자로 해석한다. 두뇌 속에서 충동을 조절하는 MAO란 효소에 관여하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범죄자가 될 확률이 증가한다는 것.

유전자 예찬론자들은 지놈혁명으로 지금까지 베일에 갇혀왔던 유전자들의 기능이 속속 규명되는 대로 유전자의 중요성이 훨씬 강조될 것으로 전망한다.

심지어 개체로 표현되는 몸은 단지 유전자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극단적 시각도 있다.

고귀한 모성애조차 유전자의 대대손손 보존을 위해 진화론적으로 생겨난 자연현상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나 지놈시대에도 불구하고 학습이나 교육 등 환경의 역할은 지속되리란 지적도 만만치 않다.

첫째 유전자 자체는 핵산과 단백질로 이뤄진 물질에 불과하며 이들이 생명으로서 가치를 발휘하려면 환경과의 접목이 필수적이란 주장이다.

울산대 의대 송규영 교수는 "실제 유전자가 1백% 일치하는 일란성 쌍둥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후천적 환경에 따라 지능과 성격 등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고 밝혔다.

삼성제일병원 한인권 교수는 "게다가 암.당뇨.뇌졸중 등 대부분의 성인병은 수백가지 유전자가 동시에 관여하며 실제 유전적 소인이 있다 하더라도 질병 발생의 도화선 역할을 하는 것은 후천적 환경" 이라고 강조했다.

둘째 설령 유전자가 중요하더라도 지금은 유전자를 인간의 의도대로 조작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금연.운동.영양 등 환경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가 취약한지는 부모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모가 유전병에 시달리거나 단명했다면 자신의 유전자도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에게 최선은 조기검진을 열심히 받고 건강관리에 힘쓰는 것. 물에 빠진 사람이 자신에게 던져진 줄이 나쁘다고 불평할 순 없기 때문이다.

유전자 만능주의를 부추기는 매스컴의 과대포장도 도마 위에 올랐다. 연세대 의대 노성훈 교수는 "현재 인류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은 뜬구름 잡는 지놈정보보다 오히려 금연" 임을 강조했다.

서울중앙병원 김영식 교수는 "외래에서 혈액 한 방울로 암을 진단해달라는 환자들을 자주 접한다" 며 "아직 실용화되지 않은 암 진단키트 등 지놈혁명의 산물이 성급하게 보도되어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고 지적했다.

인간의 성격마저 지놈 일변도로 해석하려는 유물론적 시도 역시 잘못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송규영 교수는 "최근 아이들의 성격과 적성마저 유전자 검사를 통해 밝혀낸다는 이론이 상업적으로 활개를 치지만 과학적으로 근거가 빈약하다" 고 비판했다.

윤리문제도 중요하다. 가톨릭의대 홍영선 교수는 "미국에선 인체지놈사업에 책정된 국가 연구비의 5%를 법과 윤리,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제로 사용하게 하는 ELSI프로그램이 있다" 며 "우리도 점증하는 지놈관련 윤리문제를 연구하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 고 지적했다.

중앙의료포럼 위원(가나다 순)

김녹호 서울대 보건대학원(환경보건), 김영식 울산대 의대(가정의학), 김창엽 서울대 의대(의료관리학), 노성훈 연세대 의대(일반외과), 송규영 울산대 의대(생화학), 이윤성 서울대 의대(법의학), 전우택 연세대 의대(정신과), 한인권 성균관대 의대(내과), 홍영선 가톨릭의대(내과), 황상익 서울대 의대(의사학)

<발제 송규영 교수>

● 유전 정보 소유권 등 관리 문제 논의부터

인체지놈사업의 완성은 많은 이들에게 장밋빛 희망을 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바이오산업을 선점하려는 치열한 국가적 전략과 정보 유출에 따른 인권유린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지놈혁명과 관련해 시급하게 논의해야 할 세 가지 현안을 제시한다.

첫째 국가경쟁력 강화다. 올해부터 과기부의 지놈연구 지원이 시작됐다. 총액은 크지만 연구실마다 잘게 쪼개 연구비를 지원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지놈연구의 흐름은 규모화와 집중화다. 이 점에서 국가 차원의 유전체연구센터 설립이 시급하다. 중복투자를 피하면서 우리 민족의 광범위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

둘째 유전정보의 관리문제다. 지놈혁명과 함께 빠른 속도로 개체간.인종간 유전정보가 봇물 터지듯 규명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어떤 목적으로 유전정보를 연구할 수 있으며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확연치 않다. 개인의 사생활 보호와 상업적 이용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고민해야 한다.

셋째는 유전자의 만능주의다. 질병은 물론 성격까지 인간의 모든 것을 유전자가 좌우한다는 극단적 논리다. 그러나 생물에게 환경은 유전 못지않게 중요하다.

유전자만으로 따진다면 인간은 초파리보다 고작 두 배 위대할 뿐이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유전자 만능주의는 또 다른 편견이며, 이를 극복할 대안이 제시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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