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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의료정책] 1.의보통합·의약분업 무리한 추진

중앙일보

입력

"건강보험 재정 위기는 몇년 전부터 예견돼 왔다. 의료보험 통합 과정에서 적립금을 까먹는 등 도덕적 해이가 재정 고갈을 심화시켰고, 의약분업과 관련한 몇 차례의 수가 인상이 파탄을 앞당겼다. " (최병호 보건사회연구원 의료보험팀장)

"의료보험 통합이라는 허약한 토대 위에 의약분업이라는 2층 집을 올리다 보니 집 전체가 무너졌다. " (김종대 보건복지부 전 기획관리실장)

전문가들은 건강보험 재정 파탄의 원인에 대해 의료보험 통합과 의약분업에 초점을 맞춘다.

이 두 제도의 취지는 차치하더라도 무리하게 추진하고 시행 과정에서의 문제점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 오늘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 위기의 출발점=의료보험이 당해 연도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한 때는 1996년이다. 8백77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96년의 11배인 1조원으로 커졌다.

95년만 해도 호경기에 따른 직장인들의 급여 인상으로 보험료 수입도 덩달아 증가해 적립금이 4조1천2백여억원에 달했다.

당시 보건복지부장관 산하 의료보장 개혁위원회는 가입자들의 보험료 부담이 올라가니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 확대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따라 한 해 1백80일만 의료보험 혜택을 줬으나 매년 30일씩 늘렸다. 96년 컴퓨터단층촬영(CT) 을 의료보험에 포함시키는 등 의보 혜택의 범위도 늘렸다.

97년 외환 위기를 맞아 가입자들의 소득이 줄어 보험료 수입도 줄었다. 보험료가 나가는 구멍을 더 키웠는데 수입은 줄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자연적인 증가 요인도 재정 적자에 한몫했다. 노인 인구가 7%를 넘어서면서 노인 의료비는 지난해 2조원을 넘어섰다.

전체 환자 진료 건수도 최근 5년간 매년 7.2%씩, 건강 진료비도 8%씩 증가하는 등 지출 구조를 악화시켜 왔다.

이런 식으로 보험료 지출은 최근 5년간 매년 18%씩 늘었으나 보험료 인상 등을 통한 수입 증가율은 연평균 15%에 그쳤다.

98년부터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다간 거덜난다고 경고를 거듭했고 정책 당국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 의료보험 통합이 부실 가속화〓노사정 위원회는 98년 2월 의료보험 통합을 결정했다.

이때부터 재정 부실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됐다. 1백39개 직장의료보험은 보험료를 올리지 않고 거의 모두 적립금을 까먹는 데만 열중했다.

이 중 10여개 이상의 직장의보 조합은 지난해 초 돈이 없어 진료비 지급을 못하자 의료보험연합회에서 돈을 꾸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통합 결정 직전인 97년 말 2조5천여억원이던 직장의보의 적립금은 지난해 말 8천8백여억원으로 줄었다.

지역의료보험은 지난해 한 차례도 보험료를 올리지 않았다. 올 1월 보건복지부는 지역의보 보험료를 39% 올리자고 했으나 국민건강보험공단 산하 재정운영위원회에서 15%만 올렸다.

의보 통합이 보험 가입자간의 보험료 부담을 형평에 맞게 하고 소득재분배 기능을 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보험료의 적기 인상과 재정 안정화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낸 꼴이 됐다.

◇ 의약분업이 결정타〓의료계 파업이 끝난 지난해 11월 복지부는 의보 재정 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8, 9월 진료 결과를 토대로 했다. 그때는 의료계 파업 때문에 진료비가 줄었던 때다. 그런데 파업이 끝나고 11, 12월 진료가 정상화하자 진료비가 매월 60% 가량 늘면서 의보 재정 파탄이 훨씬 앞당겨졌다.

지난 연말만 해도 복지부는 직장의보는 올해 말까지 적립금 8천8백여억원으로 버틸 수 있다고 전망했지만 크게 벗어난 것이다.

99년 11월 이후 다섯 차례의 수가 인상 중 세 차례(99년 11월, 2000년 4월.7월) 는 새로운 제도에 따른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9월과 올해 1월 수가 인상에 대해 복지부와 시민단체들은 의견을 달리 한다. 복지부는 왜곡된 의료 구조(저수가체제) 를 개선하기 위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시민단체들은 "의료계의 요구에 밀린 조치" 라고 비난한다. 여기에서 추가로 나간 돈이 9천억원이다.

정부와 여당은 99년 9월만 하더라도 의약분업에 돈이 더 안든다고 주장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1조원 이상, 의료계는 4조원 이상 더 든다고 했지만 이를 무시했다.

그러다 의약분업 직전인 지난해 6월에서야 1조5천억원이 더 든다고 인정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올해 적자 예상분인 4조원의 90%가 넘는 3조7천억원이 더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약분업이 결정타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조재국 보건사회연구원 보건산업팀장은 "당시 재정 예측을 제대로 했으면 그 이후 수가 인상이나 보험료 지출 억제 방안 등이 달라졌을 것"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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