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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조문 정치에 광장이 갈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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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2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 조문하려는 시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와 별도로 서울시청 홈페이지에 마련된 온라인 분향소엔 오후 10시 현재 100만여 명이 ‘헌화하기’ 버튼을 눌렀다.

12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 조문하려는 시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와 별도로 서울시청 홈페이지에 마련된 온라인 분향소엔 오후 10시 현재 100만여 명이 ‘헌화하기’ 버튼을 눌렀다.

두 사자(死者)의 분향소 사이 거리는 900m에 불과했다. 시민운동계의 대부였던 박원순 서울시장(10~13일, 서울광장)과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11~15일, 광화문)으로 각각 민주화(박 시장)와 국가안보(백 장군)의 아이콘들이다. 하지만 서울광장·광화문의 정치적 거리는 멀었다. 하나는 관(官·서울특별시)이 주도했다. 다른 하나는 관이 외면했다며 일부 시민이 설치했다.

박원순 빈소에 당정청 인사 총출동 #여당, 백선엽 별세 공식논평 안내 #김종인·안철수, 박 시장 조문 안해 #야당 “백 장군, 서울현충원 모셔야”

‘상징’의 소비도 달랐다. 12일 오후 10시 현재 서울광장 분향소엔 2만300여 명이 조문했다. 가족과 함께 찾은 60대 김모씨는 “시민으로서 기본적인 도리로 왔다”고 했다. 백선엽 분향소를 만든 보수단체 일파만파의 김수열 회장은 “백 장군을 편안하게 분향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데 추모 공간이 마련된 게 전혀 없어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광화문·서초동으로 갈라지듯, 다시 국론이 쪼개진 것이다. 여기엔 더불어민주당 등 여권의 ‘박원순 조문 분위기 띄우기’ 요인이 작용했다. 박 시장의 극단적 선택과 연관관계가 드러난 단계가 아니라곤 하나, 여권은 박 시장이 성추행 의혹으로 피소됐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외면했다. 차기 주자였던 ‘상징 자본’이 훼손되는 걸 막겠다는 취지다.

분향소

분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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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빈소가 차려지자 이해찬 민주당 대표, 정세균 국무총리와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등 여권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이 대표는 공동장례위원장도 맡았다. 서울시내 곳곳에 ‘고(故) 박원순 시장님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님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란 민주당 명의의 현수막이 설치됐다. 추모 메시지 역시 “19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을 하며 40년을 함께한 오랜 친구”(이 대표), “맑은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박범계 의원) 등 공(功)에 집중됐다.

이에 비해 성추행 의혹을 두곤 이 대표가 지난 10일 기자에게 “나쁜 자식”이라며 격분한 게 대표적이다. 여권 지지자들에 의한 고소인 비난 발언도 이어졌다. 서울특별시장(市葬)이어야 했냐는 논란에 대해선 박홍근(장례위 공동집행위원장) 민주당 의원은 “고인의 삶을 추모하고자 하는 수많은 시민의 애도와 마음도 최대한 장례에 담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2일 고(故) 백선엽 장군의 광화문광장 분향소에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시민들이 이 일대에 만든 두 곳 중 하나다. 한 시민단체 인사는 ’나라를 지킨 영웅은 정부가 마련한 분향소조차 없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12일 고(故) 백선엽 장군의 광화문광장 분향소에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시민들이 이 일대에 만든 두 곳 중 하나다. 한 시민단체 인사는 ’나라를 지킨 영웅은 정부가 마련한 분향소조차 없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반면에 백선엽 장군을 향한 반응은 미지근하다. 민주당은 백 장군의 별세에 대해 12일까지도 당 차원의 공식 추모 논평을 내지 않았다. 백 장군이 친일 행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앞서 민주당 일각에선 백 장군 생전에 “작고 후 현충원에 안장되더라도 추후 파묘(破墓·무덤을 파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통합당은 반대로 박 시장 빈소에 발길을 끊고 ‘과(過)’를 부각했다.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 등 당 핵심은 물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등 대다수 야당 인사가 조문하지 않았다. 12일엔 “대대적인 서울특별시장은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다. 피해자의 말에 한 번이라도 더 귀 기울이고 배려하는 게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길”(김은혜 대변인)이라는 논평을 냈다. 통합당 의원 48명은 이날 ‘성추행 의혹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 중단을 요구한다’는 성명서도 냈다.

“친노의 부활 지켜본 정치권, 사자의 정치에 매달려”

통합당은 대신 백선엽 장군을 부각했다. 장례 절차(육군장)와 장지(대전현충원) 모두 백 장군에게 걸맞지 않다는 게 통합당 주장이다. 서울현충원에 묻힌 전우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백 장군의 뜻에 따라 준비했는데 문재인 정부 들어 대전현충원으로 장지를 바꿨다는 것이다. 이날 통합당에선 “국군의 초석을 다진 백 장군을 동작동 서울현충원에 모시지 못한다면 이게 나라인가”(주호영 원내대표), “파렴치한 의혹과 맞물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치단체장은 대대적으로 추모하면서, 구국의 전쟁 영웅에 대한 홀대는 도를 넘고 있다. 국가장으로 격상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신원식 의원) 등의 발언이 나왔다.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는 백 장군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직접 조문 요구도 나왔다. “영웅에 대한 국군 통수권자의 응당한 사명”(윤상현 무소속 의원), “대통령은 편협한 붕당적 사고를 뛰어넘어야 한다”(하태경 통합당 의원)는 이유다.

여야가 ‘사자의 상징 정치’에 매달리는 걸 두고 정치권과 학계에선 “사자의 정치학이 파괴력이 크다는 걸 알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대표적 사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거론된다. 엄경영 시대경영연구소장은 “서거 이후 노 전 대통령의 과오가 모두 용서되는 분위기가 형성돼 친노 진영이 되살아났다”며 “유명인의 죽음이 진영 간 대립에 이용·활용되는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내년 4월 보선에서 ‘박원순’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컨설턴트는 “내년 서울시장 보선은 박원순이라는 ‘상징’을 긍정하는 세력과 비판하는 세력의 한판 대결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영익·김기정·권혜림 기자 hany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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