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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뒷골목 '맛집' 기행

중앙일보

입력

*** 종로1가~6가 뒤편
#그날 낮

낮 12시 점심시간.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 후문에서 쏟아져 나온 회사원들이 우르르 작은 골목길로 몰려간다. 비좁은 골목 입구에 들어서면서 이열종대(二列從隊) 가 이루어진다.

'좌회전!' 예닐곱명의 일행 뒤편에서 누군가 소리친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목적지를 알려주는 신호다. 정체와 병목 현상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던 사람들은 실핏줄 같은 새끼 골목으로 끼리끼리 흩어진다.

피맛골은 서울의 도심 한가운데 남아있는 옛 골목이다. 차량과 인파로 북적이는 종로 거리와 나란히 나있다. 이 길은 서민들의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 종로에 고관(高官) 들이 지나가면 행차 끝까지 머리를 조아리고 있어야 했던 서민들이 이를 피하려고 종로변 행랑 뒤로 길을 냈다. 그래서 이름도 '말을 피해 다닌다' 는 뜻에서 피맛골(避馬洞) 이 됐다.

종로1가~6가에 걸쳐 있던 길은 도심 재개발로 중간중간 끊기긴 했지만 아직도 교보문고 후문에서 피카디리극장까지 대부분 이어져 있다.

이 골목은 5m 정도 떨어져 있는 종로변과 독특한 대조를 이룬다.

'버거킹' 과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이 즐비한 종로변에는 뮤직 비디오를 보며 햄버거를 먹는 10대들의 유쾌함이 있다.

"그런데서 파는 음식은 왠지 정이 안가요. 깨끗하긴 하지만 해장국도 봉지에 담긴 걸 끓여 주잖아요. 통유리로 들여다 보이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

회사원 김태완(36) 씨는 "허름한 골목에 있는 식당일수록 맛있다" 고 말했다. 정말일 것 같았다.

*** "대포나 한잔 할까"

#그날 밤

오후 7시 고등어 굽는 연기와 냄새가 자욱한 골목에 들어서던 40대 직장인은 함께 걷고 있는 후배에게 "여기는 술 생각, 옛날 생각 날 때 자주 오는 곳" 이라고 말한다.

피맛골 주점들은 대부분 가게 밖에서 꼬치를 굽고 순대국을 끓이기 때문에 메뉴판이 필요없다. 주방과 객실을 따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다는 공통점도 있다. 드물게 전화 예약을 받긴 한다.

원래 서민을 상대로 한 장사가 번성했던 곳이라 오래되고 값싼 음식집이 많다. 국산 녹두로 만든 빈대떡을 돼지 기름에 지져내는 '열차집' 은 한국전쟁 때 문을 열었다.

손님이 고른 생선을 즉석에서 구워주는 '함흥집' 은 시어머니에 이어 며느리가 2대째 60년 동안 영업하고 있다.

15가지 반찬이 나오는 백반을 3천원에 파는 '남도식당' 은 골목에 삐져나온 연탄 아궁이에서 구워내는 돼지갈비가 별미다.

1차를 마친 취객들이 자리를 옮기는 8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50대 세명이 어깨동무를 했다. '빵빵!' 골목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달라며 경적 소리를 냈다.

이 골목 한편에는 머리를 염색한 20대 초반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곳도 있다.

종로2가 '금강제화' 에서 인사동길로 향하다 '피맛골' 푯말을 보고 접어들면 나타나는 주점타운. 이곳 20여개의 학사 주점은 평일에도 자리가 없을 정도다.

신세대들에게 어두컴컴하고 쓰레기가 나뒹구는 좁은 골목이 거북스럽지 않을까. 친구들과 종로에 올 때면 항상 이 골목을 찾는다는 진현진(21.백제예전1) 씨의 답은 간단했다. "싸잖아요. "

*** 허름해도 깊은 맛

#다음날 아침

가게가 모두 문닫은 오전 8시.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골목길이 붐빈다. 이들은 예전의 말(馬) 대신 복잡한 인파를 피해 이 길을 택한다. 대로(大路) 를 따라가면 돌아가야 할 곳도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을 통하면 지름길이 된다.

골목 속 깊숙이 숨어 있는 한달 20만원짜리 여관은 지방에서 며칠 출장온 샐러리맨들에게 인기다.

일찍부터 영업을 시작하는 식당들이 문을 열 채비를 하며 바가지로 퍼온 물로 앞길을 청소하는 피맛골. 한국에 3년째 살고 있다는 미국인 데보라 달튼(34.회사원) 은 "화려한 중심가 뒤편에 나있는 골목에는 문화적 다양성이 녹아 있다" 며 "주위에 누가 사는지 모두 알고 있는 골목 생활이 정겹게 느껴진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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