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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개는 오소리를, 오소리는 뱀을…산막의 먹이사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58)

새끼 금강송이 벌써 자라 전지 작업을 시작하는구나. 세월이여. [사진 권대욱]

새끼 금강송이 벌써 자라 전지 작업을 시작하는구나. 세월이여. [사진 권대욱]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냥 평화롭고 안온할 것 같은 산막에도 생존이 있고 먹이사슬이 있고 경쟁이 존재한다. 어젯밤 개들이 그렇게 짖었던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았다. 오소린지 너구린지 닭장을 기웃거리다 당한 것 같다. 그제는 뱀도 한 마리 잡았다. 닭장에 넣어놨는데 다음날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오소리가 먹어버린 것 같다. 먹고 먹히는 동물의 세계. 나는 개들을 애정하고, 개들은 오소리를 잡고, 오소리는 뱀을 먹는다. 그의 무덤을 만들고 명복을 빌어본다. 이 무슨 인연들일까. 생각이 깊어지는구나.

밤에 산막 들어가는데 중기가 왔다갔다하고 이튿날 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아랫마을 사람들 왔다갔다하고 소방물차가 오고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아랫마을에 식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원인 파악차 이곳저곳 파서 배관을 살펴보던 중 우리집 무애지지 앞이 밸브 매설지라 파보려는데, 잔디가 훼손될까 염려되어 양해를 구한다. 내가 대답했다.

“아저씨, 사람 사는 물이 중요하지 잔디가 무슨 대수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파요.”

파보니 체크 밸브가 수원지 취수원을 옮기면서 급작스러운 배관 shutting으로 인해 닫힌 게 원인이었다. 밸브를 제거하고 단관을 연결해 수습하고 모두 기쁜 낯으로 돌아갔다.

“아저씨 여기 정말 명당이네요.”
“놀러 와요.”
“놀러 와도 돼요?”
“그럼요, 나중 여기 학교 만들 텐데 그때들 와서 함께 공부해요.”

18년을 오가면서도 주민들과 별로 마주칠 기회가 잘 없었는데 어제 단수라는 비상사태를 만나 동네 아저씨들 청년들과 인정을 주고받을 기회가 생겼다. 범사유인정 후래호상견(凡事留人情 後來好相見)이라. 모든 일에 인자스럽고 따뜻한 정을 남겨두면 뒷날 만났을 때 좋은 낯으로 보게 된다. 파진 잔디는 다시 만들면 되지만 동네 사람들과의 유대는 다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 사는 이치 아닌가 싶다.

새벽 이른 시간 방제 작업에 나선다. 농약을 쓰고 싶지도 않고, 벌레들과도 공존하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려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래 면사무소에 전화했더니 사흘 만에 출동해서 완벽히 처리해 주었다. 대한민국, 여러모로 불비하고 모자라지만 이런 행정 서비스는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 그뿐인가? 책이든 물품이든 단 이틀 만에 산골까지 배달되는 나라, 치안 완벽한 나라. 자랑할 건 자랑하자.

산막 올라오는 길 따라 있는 계곡 공지에는 소나무 어린 녀석들이 자생하고 있다. 아름드리 금강송 새끼들이라 벌써부터 옮겨 심으려 했으나, 오늘 마침 일손들의 도움이 있어 실행한다. 산자락 옆 녀석들은 그대로 두면 훌륭한 숲이니, 자리를 잘못 잡은 녀석들만 옮겨 왔다. 고물 4륜 바이크에 트레일러를 매다니 훌륭한 운반수단이요, 소운반 용도로도 손색이 없겠다. 길게 보자. 어느 천년에 자라 낙락장송이 되겠나 하지 마라. 내 대에 보지 못하면 다음 대에 보면 될 것이다. 조금 긴 호흡으로 보면 온 세상이 편안하다.

한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데크 위에 있는 소나무 두 그루. 금강송이라 귀히 여겨 어린 것들을 심었건만 오늘 보니 수형이 반송 비스무리 영 아닌 것 같아 전지 작업을 실시했다. 소나무 전지에 대해서는 일도 모르지만 해놓고 살펴보니 너무나 멋지고 오월 하순 시기도 절묘했다. 진즉 해주었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가지 지탱하느라 힘겨웠을 게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쓸데없는 가지들은 쳐주는 게 맞다. 모깃불로 생솔가지를 태운다.

뭐든지 배워야 한다. 잔디 깎고 풀 베는 일은 선수급이 되었으나 과수나 정원수 관리는 많이 미흡하다. 아니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꼭 필요하다. 그래서 배운다. 유튜브.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새벽부터 열심히 소나무 전지 공부를 한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 원리 파악에 주력한다. 밑으로 난 가지, 너무 밀생한 가지, 삼각형 유지, 상호간섭배제를 통해 햇빛이 골고루 들게 하고 서로 간섭이나 방해받지 않게 하여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다. 소나무뿐이겠나, 사람도 다르지 않다. 어젯밤 잘 오던 비는 그쳤다. 비 갠 산막. 새벽의 풀 향기와 산안개가 마치 신선인듯싶다. 배우자. 행하자. 아니면 무어겠나 이 인생.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산막에서의 최고의 순간 중 하나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산막에서의 최고의 순간 중 하나다.

나는 해 뉘엿하고, 모든 생명과 우주의 철리 앞에 숨죽여 읊조리는 이 시간이 좋다. 새들도 집을 찾고 온 천지가 적막에 휩싸이는 시간. 모카는 장난질에 여념이 없고 나는 앞마당에 누워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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