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사는 데 많은 게 필요없는 산막, 너는 나의 무엇인가

중앙일보

입력 2020.05.31 09:00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56)

인연의 법은 참 무섭다. 살다 보면 이유 없이 미운 사람이 있고 뭘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있다. 논리나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다. 이 경우 우리는 전생에 빚이 있다고 설명한다. 저 밤도 저 불도, 그리고 나의 곡우도 인연이다.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좋은 인연은 살리고 나쁜 인연은 그 고리를 끊는 게 맞다.

누리가 새끼를 낳았다. 원두막 아래 깊숙한 곳이라 고물고물 소리만 들릴 뿐 몇 마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다. 새 생명의 탄생은 기쁜 일이지만 이곳서 다 감당키는 어려워 이웃과 친구에게 분양할 계획이다. 누리가 첫 새끼를 낳았던 그 날이 생각난다. 매일같이 산막을 지키지 못하니 서울에 있어도 누리 생각이 가득했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의 글을 옮겨본다.

“지금쯤 누리는 새끼를 낳았을 것이다. 왜 얘들은 사람이 아닌 개로 태어나 이 강원도 산간 오지에서 나를 주인으로 만나는 것일까? 모든 생명은 공평한가? 공정한가? 모든 사람은 공평한가? 안타깝게도 그 대답은 늘 아니오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것이 아니라 평등하도록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나도 곡우도 저 기백이와 누리도 그리고 이 산막을 거쳐 간 수많은 생명도 모두 다 카르마인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세상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우주에서 나의 존재는 얼마나 가벼운가?

새 생명이 태어났다. 누리가 새끼를 낳았다. 여덟 마리다. 곡우는 미역국 끓이기 바쁘고 나는 마냥 신난다. 기를 생각은 다음이다. 산동이도 살아났다. 생명의 봄이다. 누리와 산동이 그리고 산이 있어 산막의 아침은 평화롭다. 순두부에 김치 고구마 있어 풍요한 산막.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배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겠나. 책 두 권에 커피 한 잔, 더 바랄 것이 무엇이냐. 사람 사는데 정말 많은 것이 필요 없음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산막. 산막 너는 나의 무엇이며, 누리와 산동, 산들 너희들은 내게 또 무엇인가? 대백이 생각이 나고 누리와 여덟 마리의 새끼도 보고 싶다.”

사랑이란 이런 마음일 거다. 참 여러 가지 다양하게 산다 하겠다.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왜 사는가? 삶이 무의미해지고 존재의 가치조차 희미해질 때 누구나 스스로 묻는 질문이다. 과연 우리는 살아야 할 확실한 이유를 갖고 있는가? 여덟 마리의 새끼를 낳은 누리, 아직 눈도 못 뜬 어린 생명이 저 스스로 먹이를 찾고 움직이고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때까지, 그때까지 누리는 확실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이유란 무엇인가? 누리의 삶의 이유만큼 강력한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왜 사는 것인가?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삶이란 그저 지극정성으로 사는 것 그 외에 무슨 방법이 있을까? 이곳에 있다 보면 밥 먹다가도 음악 듣다가도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다. 그냥 살아지는 삶은 싫다.

제 어미를 졸졸따라다니는 새끼 강아지들과 이들을 챙기는 누리. 이것이 모정인가. [사진 권대욱]

제 어미를 졸졸따라다니는 새끼 강아지들과 이들을 챙기는 누리. 이것이 모정인가. [사진 권대욱]

세상을 살며 우리는 이런저런 도움을 주고받는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삶만이라도 성공일진데 돕기까지 한다면 분명 복 받은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도움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쉽게 잊어버린다. 내가 잘나 도움받았다 생각하고,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도와준 것이라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보라. 이 세상에 나 아프지 않고 남 돕는 방법이 있는지를. 그런 법은 존재치 않는다. 모든 도움에는 상응하는 아픔이 따르고 그것이 마음이 됐든 시간이 됐든 제물이 됐든 어떤 형태로든 수고를 끼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내가 남 도울 때 느꼈던 마음을 내가 남 도움받을 때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제대로 된 마음이다. 모든 도움은 또한 빚이기도 하다. 평생에 걸쳐 갚아나가야 할 빚. 이걸 아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있다. 이걸 모른다면 평생 다시 도움받을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다. 일거일동(一擧一動)에 지은필보(知恩必報)의 마음을 담는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이 더 아름답고 살만해진다. 보라 이 세상 고맙지 않은 것이 있는가를. 새도 누리도 선선한 바람도 고맙고 또 고맙다.

누리의 귀여운 강쥐들이 오늘 보니 제법 컸다.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겠다. 다음 주쯤이면 고물고물 밖으로 나오겠지. 그 모습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난다. 어떻게 키울지는 담에 생각키로 하고, 지금은 맘껏 사랑해야겠다. 오늘은 둘째 놈 내외를 불러 혼밥을 면한다. 사내아이 두 놈 키우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모정이 아니면 그 뉘라 감당하랴. 생명을 이어가는 힘. 종을 보전하는 하늘의 섭리. 사람 다르고 누리가 다르지 않다. 할애비는 그저 예뻐해 주면 되니 나이 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구나. 모정이란 무엇인가? 모든 어린 것은 어떻게 이리도 사랑스러운가?

나는 산막에서아름다운 나라를 꿈꾼다. [사진 권대욱]

나는 산막에서아름다운 나라를 꿈꾼다. [사진 권대욱]

공사 끝난 산막 주변을 돌아본다. 물과 숲, 계곡과 돌, 소나무와 단풍, 연기 피는 이층집, 누리와 강쥐와 닭들, 새로 생긴 공지과 각종 인공들, 이들 또한 세월이 가면 익혀지고 어우러진다. 돌 틈에는 풀이, 수로에는 나무가 자랄 것이다. 숲이 될 것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이다. 세월 가면 잊히고 그렇게 또 세월은 가는 것이다.

지금은 미칠 듯 분노하고 세상이 뒤집힐 듯해도 세월 가면 허허 잊히고 마는 것이다. 나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다. 그러니 무얼 할 것인가? 정자에 누워 꿈꾸는 도리밖엔.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아름다운 나라.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고 번번이 못 찾고 돌아오던 거기, 눈감으면 불쑥 한 발자욱 앞에 다가오는 거기, 아름다운 나라.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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