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일하고 싶다" 주부들이 뛴다

중앙일보

입력

“나도 일하고 싶다.”

이 말을 전업주부의 한가한 푸념으로 여긴다면 세상 바뀐 줄 모르는 소리다.요즘 많은 주부들의 관심은 그들의 ‘일’이다. 출산과 육아에 몰입했던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크면서 그들은 자신이 할 만한 일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일손을 놓은 몇 년이 지난 그들에게 딱히 떠오르는 일거리는 없다.솔직히 자신도 없다.용기내서 인터넷이나 PC통신에서 알게된 주부모임 동호회에도 참석하지만,그는 다시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일을 갖고 싶다”고.

프리랜서로 뛰는 주부들이 있다. 가사와 일을 병행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주부만이 갖는 ‘공백기’를 거쳐본 이들은 자신이 일할 수 있는 영역을 개척하는데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결혼 12년차로 두 자녀를 둔 이정화씨(36)는 프리랜서 번역가다.그는 첫 아이가 놀이방에 가기 시작하면서 번역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 번역을 했던 그는 PC통신 번역 동호회에 소개서를 올리고 프리랜서그룹에도 회원으로 등록해놓고 꾸준히 번역가로 6년이 넘게 활동해왔다.

이씨는 “나이들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번역일은 나에게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고 말한다.

첫 아이가 초등학교 2년생인 주부 황윤선씨(33)는 남편의 권유로 생각그물(방대한 양의 정보를 이미지로 요약하는 사고법)강좌를 듣기 시작해 아예 강사로 전업한 경우다.

방송.신문.기업 등의 모니터로 꾸준히 활동해온 그는 98년 NIE와 생각그물 강좌를 1년간 쫒아다니며 초.중.고급 과정을 수료하고 1년째 강사로 일해오고 있다.

황씨는 “강좌 하나 마치면 남들이 일자리를 줄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잘라 말한다.“강사 자리는 끊임없이 공부하고,내 이력서와 강의 계획서를 들고 적극적으로 뛰어다닌 끝에 겨우 얻은 일”이라는게 그의 설명이다.

백은하씨(30)는 결혼 2년차지만 아직 아이가 없는 새내기 주부. 그는 20만부를 발행하는 모화장품 회사의 사보 기획·취재를 맡고 있다.

대행사로부터 취업 권유를 받았지만 고민 끝에 전문직으로서 프리랜서를 고집하기로 한 배씨.“내가 할 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그는 ‘프리랜서 예찬론’을 편다.배씨는 “일에 대해 내려지는 평가와 인정이 곧 고정 일거리로 이어진다”면서 “오히려 출산 후에 프리랜서의 진가가 발휘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밖에도 아르바이트 정도로 여겨지던 방송이나 신문·웹 모니터도 전문화돼가고 있는 추세다.여성지나 교육잡지 등에 고정적으로 글을 기고하는 주부들이 적잖다.

조인스 닷 컴(http://www.joins.com)의 사이버 리포터와 웹 모니터·웹진 필자로 활약하고 있는 주부 옥은희씨(30)는 “14개월짜리 아이를 돌보느라 시간이 모자라 더 못할 뿐이지 인터넷 뒤져보면 일할 거리가 생각보다 많다”고 말했다.

프리랜서로 뛰는 주부들은 30대 초중반 나이,대졸 출신이 대부분이다.출산과 육아를 위해 일을 ‘쉴 수는 있어도 그만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도 이들의 공통분모다.“일은 무슨 일이냐”며 핀잔을 주는 남편을 둔 사람은 아무도 없다.각기 편차가 크지만 이들의 수입은 월 평균 1백만원 안팎.

“많은 시간과 노력을 집중해 일하는데 비해 보수가 짜다”는 것을 이들은 가장 큰 아쉬움으로 꼽았다.“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던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저는 이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전문강사로 자리잡을 계획입니다.계속 공부하고 일할건데 더 노련한 전문가가 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이것은 황윤선씨만의 포부는 아닐 것이다.

이은주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