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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위험 수준 미·중 갈등, 냉정한 대응만이 우리의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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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위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빼고 산업 공급망을 다시 짜자는 ‘경제 번영 네트워크(EPN)’ 제안으로 ‘대중 봉쇄’ 카드를 흔들기 시작했다. 중국은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맞불을 놨다. 양국 간에 ‘미친 놈’ ‘악랄한 독재정권’이란 막말까지 오가면서 ‘신냉전’ 구도가 지구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패권 전쟁 격화되며 난처한 한국 입장 #말 한마디도 조심하는 신중 외교 절실 #현안별로 대응하되 장기전도 대비해야

이럴수록 정부는 냉정하고 전략적으로 처신해야 한다. 정치·군사적으로는 혈맹인 미국의 입장을 모른 척하기 힘들다. 그러나 안보 이슈를 넘어 무역 전반에서 미국의 대중 봉쇄 구상을 따라간다면 부담이 막대할 수 있다. 결국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현안별로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난 22일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미·중 간 갈등이 격화되고 있어 고민스럽다”고 말한 건 굳이 그럴 필요성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아직은 미·중이 우리에게 대놓고 ‘선택의 순간(Moment of truth)’을 강요한 상황이 아니다.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키스 크라크 미 국무부 경제차관이 “한국과 EPN 구상을 논의했다”고 했지만, 구상 단계일 뿐 구체적 요청을 해왔다고 보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고민 중”이란 속내를 드러내며 우리의 입지를 ‘중간자’로 국한시킬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남북 협력에 대한 미국의 압박을 비판하며 남북 정상회담 재개와 대북 지원 확대를 주장한 것도 적절치 않다. 지금 남북 관계가 교착된 건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남측과의 소통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북한이 핵무장과 미사일 발사를 계속하는 마당에 대북 제재망을 뚫고 지원해 주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정부가 비현실적인 남북 교류 확대를 외치면 미·중 갈등 국면에서 한국의 외교적 입지만 줄어들 우려가 크다. 정부가 각별히 공을 들이고 있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역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 중국은 미국과의 갈등 격화로 한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정부는 이 기회를 역으로 활용해야 한다. 시 주석이 우리 초청에 앞서 스스로 방한 의사를 밝히도록 유도하고, 그의 방한이 미·중 간 긴장 요소로 작용하지 않도록 의제를 조정하는 전략적 외교를 펼쳐야 할 것이다.

오는 11월 미 대선이 끝나면 미·중이 타협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작금의 미·중 갈등은 본질적으로 21세기 글로벌 패권을 둘러싼 ‘빅2’의 혈투다. 어느 한쪽이 이기기 전에는 끝나기 힘든 ‘뉴노멀’일 수도 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단기적 대응에만 치중하면 언젠가는 미·중 사이에서 정말로 ‘진실의 순간’을 강요받는 상황이 오지 말란 법이 없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노력도 절실하다. 무엇보다 지난해 우리 전체 수출액의 25%를 차지한 중국에만 의존하지 말고 시장을 동남아·중동·유럽·남미 등으로 다변화하는 데 일단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