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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양형 기준도, 김영란법 취지도 무시한 유재수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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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 관련 사건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청와대 근무 당시 감찰에 비위가 포착됐지만, 감찰을 멈추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상당한 비위가 확인됐는데도 징계나 고발 대신 영전을 거듭했다. 우여곡절 끝에 재판에 넘겨진 유 전 부시장을 지난 22일 서울동부지법이 집행유예로 풀어준 것은 이런 비상식의 정점이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유 전 부시장을 기소하며 “전형적인 탐관오리”라고 표현했다. 현금 수수는 기본이고 책 강매, 항공권이나 명절 선물 대리 결제, 골프텔 공짜 이용, 전세금을 무이자로 빌린 뒤 일부 탕감받기 등 수법도 다양하고 금액도 만만치 않다. 법원도 대부분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4명으로부터 4220만원 상당을 받았고, 대가성과 직무 관련성도 있는 것으로 봤다.

대법원의 양형 기준에 따르면 뇌물액이 3000만~5000만원이면 기본 형량은 징역 3~5년이다.

유 전 부시장의 경우 대부분이 뇌물을 먼저 요구해 받았다. 2년 이상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차례 돈을 받았다. 대법원이 제시한 양형 기준 해설에 명시된 더 높은 형량을 선고할 요인이다. 재판부 스스로도 "업무 관련성이 있는 회사 운영자로부터 반복해서 뇌물을 받은 것은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이를 모두 무시하고 초범이라는 감형 요소만 인정해 하한선에도 못미치는 형량을 정했다.. 작정하고 봐준 판결이란 비판을 벗기 어렵다. 돈을 준 사람들이 사적으로 친했다는 점을 감형 요소로 판단한 것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나중에 뇌물을 주려면 미리 친분을 유지하라고 권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뇌물죄의 경우 집행유예를 해주면 안 되는 사유도 정해 놓고 있다.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반성도 하지 않는 등의 사유가 겹치면 실형을 권고한다. 재판부는 이마저도 무시했다. 유 전 부시장이 받은 여러 뇌물 중 몇 가지는 김영란법이 통과된 뒤 받았다. 뇌물죄 적용은 대가성을 입증하기 어려워 처벌하기 어렵다는 게 법조계의 지적이었다. 그래서 공무원은 대가성과 상관없이 돈을 받지 말라고 만든 게 김영란법이다. 100만원이 넘으면 3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선 더 무거운 뇌물죄가 적용된다는 이유로 아예 배제됐다. 법리로는 맞지만 정말 그렇다면 법의 취지는 살려야 했지 않았을까.

이렇게 법원 스스로 정한 양형 기준을 무시하면 판결은 신뢰받을 수 없다. 게다가 조국 전 민정수석 등 유 전 부시장을 봐준 혐의를 받는 사람들의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민으로선 재판부가 권력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