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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섬진강 물안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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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누구인가 곁에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요. 날마다 지리산은 섬진강 물에 푸른 발을 씻고, 섬진강은 지리산의 발을 씻겨주며 화색이 돕니다. 대개 강은 흐를수록 탁해지지만, 섬진강은 3급수의 지친 얼굴로 흐르다 마침내 지리산을 만나면서 1급수의 청아한 얼굴이 되지요.

요즘처럼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한 환절기엔 풀잎들이 마르고, 밤새 잠 못 이루며 콜록거리는 동안 희뿌연 물안개가 오릅니다. 알몸의 섬진강이 밤마다 희고 보드라운 잠옷을 입는 것이지요. 이른 아침 물안개의 잠옷을 살짝 들추면 물의 젖가슴엔 아직 어린 물고기들이 두 눈을 뜬 채 잠들어 있고요. 또 하루의 태양이 수중 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번이라도 오리무중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어본 이라면 알지요. 차라리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서있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물안개의 젖은 속살, 얼굴에 와 닿는 촉촉한 감촉에 마음을 주다 보면 어느새 길이 열리고, 저 쪽에서 또 다른 내가 강둑길을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때로 삶이 막막할 때 나를 찾아 떠나는 섬진강 무진기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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