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뭐든지 다 기록하고 평가, 왕도 두려워했던 사관의 붓

중앙일보

입력 2020.04.12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14)

근정전 북쪽 담장이 사정전의 행각으로 사정전(思政殿)은 임금의 집무실이다. 사정전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어올린 것으로 임금이 깊게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 백성을 굽어살필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치자(治者)의 본분을 일깨우려는 의미이다. 사정문으로 들어서면 왕의 집무공간인 사정전이 나온다. 편전인 사정전의 동쪽에 만춘전(萬春展)과 서쪽에 천추전(千秋展)이 있다.

사정전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고 내부에 어좌가 설치되어 있다. 사정전에서는 대신, 중신, 중요아문의 당상관, 경연관, 승지, 사관 등이 매일 왕을 알현하는 상참(常參)이 있었고 왕과 신하가 국정을 의논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왕은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세종은 20년 동안 성종은 25년 동안 하루도 경연을 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종은 하루에 세 번의 경연을 가졌다고 한다.

지금 사정전 북벽 높이 운룡도(雲龍圖)가 걸려 있었는데 실제로 언제 그려졌는지 또 원래부터 사정전에 걸려 있던 그림인지 그 진위가 확실치 않지만 구름 속에 꿈틀대고 있는 용의 모습은 군신 간의 관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매일 이곳 사정전에서 나랏일을 논하던 왕과 신하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사정전 내부. [중앙포토]

사정전 내부. [중앙포토]

사관(史官)
왕은 사정전에서 아침조회인 상참이 끝나면 승지를 비롯하여 공무가 있는 신료들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는다. 이때에는 반드시 사관이 동석하여 왕에게 보고되는 모든 사항을 직접 듣고 기록한다. 사정전 안에는 왕의 어좌 앞 양쪽에 두 개의 작은 탁상이 있는 데 어전회의에는 회의 내용을 일일이 기록하던 사관들이 양쪽에 앉았다.

고대 중국에는 원래 천자의 말을 기록하는 좌사(左史)와 행동을 기록하는 우사(右史)가 있었다고 한다. 왕과 관리들이 그들의 기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록인 사초(史草)는 왕의 사후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춘추관시정기(春秋館時政記)와 함께 실록 작성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들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동시에 그 잘잘못 및 인물에 대한 비평뿐 아니라 기밀사무 등을 직필하였다.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사법(史法)이 매우 엄하여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가 없었으며 왕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들의 사초를 볼 수 가 없었다. 그 만큼 조선왕조의 기록문화에 관한 사관들의 도덕성은 엄격했으며 그들의 기록은 그 비밀을 보장받았다. 사관들은 독립성과 비밀성을 부여받은 만큼 사소한 사항까지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작성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실록은 왕조 창건부터 472년간의 25대에 이르는 국왕(태조-철종)의 역사적인 기록으로 1997년 10월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실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장구한 세월에 걸친 기록 문화이며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백과사전적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예, 종교생활로부터 천문, 지리, 음악, 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 천문현상과 그 당시 동북아의 외교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 적상산사고본.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왕조실록 적상산사고본.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왕조실록은 편년체(년월에 따라 기술하는 역사 편찬의 한 체재)의 역사서로 그 사료적 가치 중 하나로 기록의 상세함에 있다. 사관들은 당대 벌어진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사소한 것까지 모든 것을 기록했다. 조선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사관(儒敎史觀)이 반영된 역사적 기록물로 인물에 대한 일대기 뿐 아니라 민간에서 유교적 풍속에 관련 된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의 전후 상황과 결말을 빼놓지 않고 서술하였다.

사관의 기록은 군주라 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비밀이 보장되었던 제도가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보장하였다. 활자로 인쇄 간행된 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선 말기까지 수많은 전란을 치르면서도 이들 실록이 완전하게 보존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보기 힘든 예이다.

실록의 보관
선왕의 실록 편찬이 끝나면 최종원고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하여 깊은 산중에 사고(史庫)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역대실록은 태조 초(太祖初)부터 서울 춘추관(春秋館)과 충청도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봉안되어 왔다. 세종 21년(1439)에는 경상도 성주(星州)와 전라도 전주사고가 설치되어 네 군데의 사고(四史庫)에 보관되어 왔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 성주사고가 불타고 전주사고만 병화를 면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1606년 전주사고본 실록을 원본으로 다시 5벌을 인쇄하여 춘추관과 강화 마니산,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의 다섯 곳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다시 1636년 병자호란으로 마니산 사고에 있던 실록이 많이 훼손되자, 현종 때 훼손되고 없어진 실록을 보수하여 숙종 조에 정족산사고를 새로 짓고 실록을 옮겼다.

춘추관사고는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 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졌고, 일제강점기에 오대산사고본은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졌으나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다. 태백산사고본은 서울대학교에 이관되었다가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고, 현종 때 새로 지은 정족산사고본은 서울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1633년(인조 11)에 묘향산사고본을 옮겨 보관한 전북 무주의 적상산사고본은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되어 1910년 창경궁 장서각에 이관되었다. 창경궁 안에 있던 장서각은 왕실의 책들을 모아두던 서고였는데 6.25전쟁 때 장서각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은 북한으로 가져갔다.

초기: 서울 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

후기: 춘추관사고, 마니산사고, 태백산사고, 묘향산사고, 오대산사고.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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