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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울퉁불퉁 거친 돌을 근정전 마당에 깔아놓은 뜻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12)

근정전 마당은 조정(朝廷)이라 부른다. 조정에는 거칠게 떼어낸 돌 박석(薄石)이 바닥 포장재로 깔려있다. 근정전의 마당에 깔린 박석은 투박하게 다듬어서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울퉁불퉁하고 거친 느낌이다. 제대로 마무리를 한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이 거친 마감마저도 의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매끄럽게 다듬질한 석재 표면은 보기에는 깔끔해 보일 지라도 장시간 야외에서 진행하는 행사의 경우 사람들은 햇빛의 반사로 인한 눈부심으로 몹시 지치게 된다. 박석의 거친 마감은 이런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배려로 빛의 되쏘임 현상을 차단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표면이 거칠어 미끄러운 가죽신을 신은 관리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었으며,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배수가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지표면의 경사를 두고 포장되었다.

비오는 날 근정전 마당 박석 위로 쏟아지는 물길을 보면 일제히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양 끝의 수구로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냥 근정전 마당에 들어섰을 때는 지면의 경사를 전혀 느낄 수 없는데 동서 양 행각의 기단을 살펴보았을 때 차이가 확실 해 진다. 박석의 자연스러운 형태와 여러 기능들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조선의 건축에 어울리는 훌륭한 부재였다. 자연석(화강암)을 거칠게 떠내어 깔아놓은 박석이 지니는 자연스러운 돌 맛이 얼마나 장중하고 아름다운지는 근정전 조정에서만 느껴 볼 수 있다.

박석의 거친 마감은 햇빛의 반사로 인한 눈부심을 차단하고, 미끄러운 가죽신을 신은 관리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었으며,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배수가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지표면의 경사를 두고 포장되었다.[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석의 거친 마감은 햇빛의 반사로 인한 눈부심을 차단하고, 미끄러운 가죽신을 신은 관리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었으며,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배수가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지표면의 경사를 두고 포장되었다.[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 궁궐 공사 때 사용된 석재는 돌의 중량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채석하려 했다. 궁궐 공사 때 사용한 다양한 용도의 석재들은 서울 가까운 곳에서 얻었지만, 바닥에 깔리는 박석은 강화 석모도와 해주에서 채석한 것만 사용하였는데, 특히 강화 석모도 박석은 그 절리가 고르고 반듯해서 많이 사용하였다. 1647년(인조 25) 창덕궁 공사 때 사용된 박석은 모두 강화도에서 채석되었고, 18세기 궁궐 공사 때는 창의문 밖이나 남산 아래 인근에서 채석했다고 한다. 1906년 경운궁 중건을 비롯해 대한제국 시절에 진행된 궁궐 공사에도 석모도에서 채석한 박석을 사용하였다. 박석은 돌의 절리(節理)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형태와 바닥재로서의 여러 기능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조선의 건축에 잘 어울리는 훌륭한 부재였다.

옛 사람들이 선택했던 궁궐의 박석이 얼마나 자연친화적이고 아름다운지를 확인하려면 남아있는 본래의 박석과 새로 복구한다고 깔아놓은 현대 박석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해 진다. 일제강점기에 궁궐 마당의 박석을 들어내고 잔디를 심었다가 해방 후 다시 복원한 창덕궁이나 창경궁 덕수궁의 기계로 다듬은 박석을 보면 기계의 맛이 얼마나 인위적인지 당장에 비교가 된다. 화강암이 지닌 거친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사람의 손맛에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 조선 궁궐의 박석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물건이 있으니 바로 박석에 꽂힌 무쇠고리이다. 박석에 박혀 있는 쇠고리는 무엇에 쓰였던 것일까. 옛 그림이나 궁중의 행사를 기록한 의궤(儀軌)를 보면 고리는 행사 때 해 가리개용 차일을 칠 때 그 끈을 고정시켰던 것으로 마당에만 박혀 있는 것이 아니고 근정전의 기둥이나 창방에도 여럿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 박석 고리라는 물건이 설치된 자리를 살펴보면 죄다 3품까지의 고위관리들이 서는 위치이다. 고위직 공무원은 햇볕이 따가워지면 해 그늘이라도 얹을 수 있는데 아랫사람들은 그냥 참아야하는 고된 일상이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출세는 해야겠구나. 아니면 아예 신선처럼 자연에 은둔하여 임금이 아무리 불러도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던지.

품계석은 국가 행사시 관리들이 자신의 품계대로 도열하던 표지석이다. 동쪽에 문반, 서쪽에 무반이 섰는데 조선왕조가 양의 위치에 문관을 음의 위치에 무관을 둠으로써 문치를 숭상했음을 읽을 수 있다. [중앙포토]

품계석은 국가 행사시 관리들이 자신의 품계대로 도열하던 표지석이다. 동쪽에 문반, 서쪽에 무반이 섰는데 조선왕조가 양의 위치에 문관을 음의 위치에 무관을 둠으로써 문치를 숭상했음을 읽을 수 있다. [중앙포토]

좌우 열두 신하 자리 표시…조정의 품계석(品階石)
근정전을 바라보면서 조정의 중심부에 삼도가 있고 삼도 양쪽으로 동쪽과 서쪽에 품계석(品階石)이 나열해 있다. 국가 행사시 관리들이 자신의 품계대로 도열하던 표지석으로 동쪽에 문반이 서쪽에 무반이 섰는데 이 품계석의 배치에서도 조선왕조가 양의 위치에 문관을 음의 위치에 무관을 둠으로써 문치를 숭상했음을 읽을 수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품계는 1품부터 9품까지 정(正), 종(從)으로 나누어 18품으로 하고, 종6품 이상의 정, 종은 다시 각각 상, 하의 2계로 나누어 모두 30계(階)로 나누었다. 정3품 상계(上階)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은 당상관(堂上官), 정3품 하계(下階)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 종6품까지를 당하관(堂下官), 참상(參上)이라 하고, 정7품부터 종9품까지를 참하(參下)라 하여 구분했다. 당상관은 말 그대로 당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위치, 즉 당상의 교의(交椅)에 앉을 수 있는 관원을 말한다.

근정전 조정에 설치된 품계석은 1품부터 9품까지의 품계를 표시했는데 모든 품계의 차등을 다 품계석으로 표시한 게 아니고 1품부터 3품까지는 정(正)과 종(從)을 구분했고, 4품부터 9품까지는 정만 세웠다. 동서 양쪽에 모두 12개씩의 품계석을 세웠다. 조정에서 조하를 할 때 모든 관원들이 다 도열해 참석한 게 아니라 주요 관직을 중심으로 참여하고 하급관리의 경우는 일부만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답도에는 구름 속에 노니는 봉황이 한 쌍 조각되어 있는데, 봉황을 새긴 의미로 백성을 위한 성군의 정치를 기원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답도에는 구름 속에 노니는 봉황이 한 쌍 조각되어 있는데, 봉황을 새긴 의미로 백성을 위한 성군의 정치를 기원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답도(踏道)를 지나 월대에 오르다
근정전 월대를 오르는 가운데 계단 어계(御階)에는 답도(踏道)가 있다. 답도는 말 그대로 해석하면 왕이 밟는 길이다. 그러나 실제로 왕은 여(輿-가마의 일종으로 뚜껑이 없다)를 타고 경사지게 설치된 답도 위를 지나갔다. 답도에는 구름 속에 노니는 봉황이 한 쌍 조각되어있다. 봉황은 상상의 영물로 오동나무숲에 깃들고 대나무열매를 먹으며 살아있는 것을 다치지 않고 태평성대에만 나타나는 상서로운 새라고 했다.

왕이 지나는 답도에 봉황을 새긴 의미로 백성을 위한 성군의 정치를 기원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더구나 왕은 봉황을 감싸고 있는 구름 위를 지나 천상의 세계에 오르는 성군이 아닌가. 답도의 양쪽에는 해치가 조각 되어 있고 어계 면에는 당초문양을 새겼다. 당초는 덩굴식물로 봄이 되면 새 순을 내고 무한히 뻗어나가는 형상은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는 문양이다.

조선시대에 환경적인 요인으로만 집을 높이기 위해 월대를 높였다기 보다, 임금을 우러러 보기 위해 왕의 권위를 위한 건축적 요소로 그 상징성을 살펴봐야 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환경적인 요인으로만 집을 높이기 위해 월대를 높였다기 보다, 임금을 우러러 보기 위해 왕의 권위를 위한 건축적 요소로 그 상징성을 살펴봐야 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근정전의 월대(月臺)는 상월대와 하월대,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을 세우는 기단이 높으면 건축적으로 습기를 방지하고 집의 통풍이 잘되니 쾌적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환경적인 요인으로만 집을 높이기 위해 월대를 높였다고 보기보다 그 상징성을 살펴야한다. 월대는 만인이 높은 곳에 있는 존엄한 임금을 우러러 보게 하기 위해 왕의 권위를 위한 건축적 요소이다. 조정에서 행사가 있을 때, 월대는 무대의 확장으로 상월대에는 정3품 이상의 당상관들만 오를 수 있었고 하월대에서는 악공들이 연주를 했다고 한다.

근정전 월대에 올라 하월대를 빙 둘러 보면 근정전을 바라보는 느낌이 걸음마다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단 위의 상월대는 건물 가까이 다가 선 위치라서 근정전의 내부를 들여다보기에 좋지만 늘 붐비는 곳이라서 전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하월대는 사람이 많지 않고 거리도 적당해서 더 가까이 전체적인 근정전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더구나 하월대의 박석은 상월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적었던 때문에 그 온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박석의 전체적인 아름다움과 발바닥에 느껴지는 느낌도 좋다. 월대라는 기단의 의미대로 달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서 근정전 추녀선과 뒤편의 백악까지 한눈에 담아볼 수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내 눈에 들어오는 자리이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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