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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중년의 위기’ 활로가 안 보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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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호 20면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들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들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들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최이현 옮김
글담출판사

은폐된 쿠데타 등 사방에 적 #더디 오지만 종말 모면 힘들어 #중국식 실용 독재 대안 못 돼 #기술발전 도움 될지도 미지수

제21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4·15 총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그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나름의 어두운 면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속성 자체가 그런 취약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허술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실험, 공천 과정에서의 잡음 등 이번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많은 문제가 뭔가 부족한 듯한 민주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 줬다.

근자에 들어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들』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저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 정치학과 데이비드 런시먼 교수는 현대 서구 민주주의가 ‘중년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봤다. 지구 상에는 정기적으로 선거가 치러지고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 입법부와 독립적인 사법부, 자유로운 언론이 있긴 하지만 제도나 기관이 본연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속이 빈 민주주의’가 도처에 널려 있다. 이 책은 한국어판 제목처럼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세 가지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협을 분석하고 민주주의를 대신할 대안들의 장단점을 설명한다.

현대에서 민주주의를 중단시키는 국가 전복 형태의 군사쿠데타 가능성은 매우 작아졌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매우 은밀한 방식으로 쿠데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유예하는 ‘행정부 쿠데타’, 선거 과정을 조작하는 ‘부정 투표’, 선거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장악하는 ‘공약성 쿠데타’, 이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한 번에 민주주의를 전복하지 않고 체제를 조금씩 약화시키는 ‘행정권 과용’, 선거 과정을 은밀하게 조작해서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전략적 선거 조작’ 등이 그것이다. 겉으로는 민주주의가 훼손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종류의 쿠데타는 민주주의의 파괴를 은폐한다. 민주주의의 지속가능 여부를 알아보는 실험은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확실한 종점은 없겠지만.

국가를 전복하는 군사쿠데타 가능성은 작아졌지만 민선 정부의 ‘행정권 과용’ 등 간접적 쿠데타는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다. 사진은 2016년 터키 쿠데타 실패로 해고된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경찰이 진압하는 장면. [AFP=연합뉴스]

국가를 전복하는 군사쿠데타 가능성은 작아졌지만 민선 정부의 ‘행정권 과용’ 등 간접적 쿠데타는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다. 사진은 2016년 터키 쿠데타 실패로 해고된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경찰이 진압하는 장면. [AFP=연합뉴스]

기후변화, 핵전쟁, 생화학 테러, 살인 로봇 등장, 네트워크 붕괴와 같은 대재앙은 민주주의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 있는 치명적 요소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간 지속할 경우 경제·정치·사회 전체가 무너져 민주주의도 함께 파괴될 가능성이 있다. 상호연결성이 극대화해 어느 한 분야만 무너져도 연쇄적으로 전 시스템이 무너질 위험도 존재한다. 문제는 머지않아 닥칠 수 있는 이런 다양한 대재앙 앞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유권자들은 실존적 위험에 관심이 덜한 것처럼 보인다.

급속한 정보기술의 발전도 인간의 소외와 민주주의의 왜곡 가능성을 낳을 수 있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직접민주주의가 정당이라는 타협 기구를 제거함으로써 마녀사냥과 같은 극단적인 사태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디지털 기술은 여러 비민주적 체제가 장악한 권력도 강화해 왔다. IT 기술은 가끔씩은 독재를 무너뜨리기도 했지만 권력의 또 다른 도구가 된 사례가 더 많다.

현재 민주주의의 대안으로는 중국, 러시아 등에서 볼 수 있는 21세기식 실용주의적 독재체제, 지식인에 의한 정치를 의미하는 에피스토크라시가 거론된다. 하지만 이들은 오늘날처럼 대단히 불확실한 상황에서조차도 민주주의와 경쟁하지 못한다. 선거를 거치기는 하지만 자유를 박탈하는 ‘경쟁적 권위주의’는 민주주의의 패러디에 불과하다.

고도로 발전된 기술이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것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다. 그중 일부는 놀랍고 일부는 두려우며 대부분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 가능성의 범위는 인간이 지금껏 경험해 왔던 것만큼이나 광활하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으므로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싫어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지만 예상 가능한 미지의 선택지와 비교하면 민주주의는 여전히 편안하고 친숙하다. 결국 우리는 민주주의 안에 사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더디지만 확실하게 민주주의는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운이 좋다면 위기를 겪으며 조금은 더 단련돼 죽음을 조금씩 연기할 수는 있다.

4·15 총선은 앞으로의 한국의 정치지형을 결정한다.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묻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은 한국을 포함한 각국의 민주주의 미래를 통찰해 볼 수 있는 리트머스시험지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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