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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확 바꾼 '아줌마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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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주부들의 작은 힘이 지역 공공도서관을 바꾸고 있다. 광진정보화도서관에 모인 '광진 도서관 친구들' 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심혜영.서현.송선경.여희숙(대표).임예숙.이윤선.조미아씨, 뒷줄 왼쪽부터 이영숙.최윤희씨. 김성룡 기자

지난달 21일 오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광장동의 광진정보도서관 이야기방.

9명의 주부가 모인 가운데 한창 토론이 벌어졌다. 주부들은 지난해부터 도서관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선 '광진 도서관 친구들' 회원. 주부들은 곧 있을 서울대 이태진(국사학) 교수 초청 특강 준비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모였다.

회원들은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정해 읽은 뒤 느낀 점을 토론하는 '한 책 읽기' 프로그램의 도서로 이 교수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를 선정했다. 구한말 고종의 역할을 재평가한 이 교수의 시각에 감명받은 회원들이 초청을 제안해 성사됐다. 이 교수는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 강연료를 받지 않겠다"며 흔쾌히 강의를 수락했다.

'특별한 강연'을 위해 회원들의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송선경 회원은 "많은 사람이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포스터를 만들어 10여 개 아파트 단지에 붙이자"고 제안해 바로 채택됐다. 전철을 타고 오는 이 교수를 역에서 안내할 당번도 정했다. 책 100권을 공동 구매해 수강생에게 싸게 팔자는 의견도 나왔다.

'아줌마의 힘'이 공공 도서관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단순한 이용자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도서관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도서관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광진정보도서관을 애용하던 주부 이용자 17명이 '광진 도서관 친구들'을 만든 것은 지난해 9월.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둔 뒤 독서 토론 강사로 활동하던 여희숙(46)씨가 주도했다. 명지대 김영석(문헌정보학) 교수의 특강을 계기로 적극적인 도서관 이용 운동으로 방향을 잡았다. 현재 회원은 130여 명, 주부가 대부분이나 아내를 따라 준회원으로 가입한 남편도 적지 않다.

회원들은 출판사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책을 기증받아 두 차례 바자를 열었다. 그 수익금으로 도서관 내 이야기방의 암막(暗幕.빛을 차단하기 위한 검은 막), 책을 받치고 읽을 수 있는 독서대 등 300만원어치를 구입해 도서관에 기증했다. 도서관은 예산이 빠듯해 엄두도 못 내던 일이다. 매월 셋째 주 월요일 외부 강사 초청 특강도 도서관에 맡기지 않고 올해부터 회원들이 나서서 섭외.경비까지 맡고 있다.

회원 신혜영(40.구의동)씨는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읽거나 빌리는 장소인 줄로 알았으나 도서관 친구들 활동 이후 독서.생활 문화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5.31 지방 선거 기간에는 도서관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질의서를 출마자들에게 보냈고 10월 구 의회가 열리면 도서관 예산안 처리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볼 계획이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도서관 측도 긍정적이다. 오지은 사서과장은 "도서관 예산이 넉넉지 못한데 주민들이 도서관의 주인을 자처하고 나서 운영을 도와 줘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광진 도서관 친구들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유사한 모임이 생겨나고 있다. 6월 말 문을 연 동대문정보도서관에도 '도서관 친구들'이 지난달 중순 회원 12명으로 만들어졌다. 과천정보도서관에서도 주부 이용자들이 중심이 돼 비슷한 모임을 계획하고 있다.

명지대 김영석 교수는 "미국에서는 공공 도서관을 돕는 주민 모임인 '도서관 친구들(Friends of Libraries of USA)'이 전국적으로 수천 개나 있다"며 "공공 부문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주민 스스로 떠맡는다는 점에서 뜻이 있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inform@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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