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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꿀이죽 끓여 먹던 시절 탄생, 짜파구리도 이 라면 없었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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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수 브랜드]28. 삼양라면

캐나다 오로라빌리지에서 판매하는 삼양라면. [사진 삼양식품]

캐나다 오로라빌리지에서 판매하는 삼양라면. [사진 삼양식품]

‘꿀꿀이죽이 서울 사람의 최고의 영양식이던 때였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공항에서 만난 사람’에 등장하는 문구다. 1953년 6·25 전쟁이 멈추자,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한국에선 이른바 ‘꿀꿀이죽’이 퍼졌다. 꿀꿀이죽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잔반과 음식 찌꺼기를 모아서 한데 넣고 끓인 음식이다. 돼지나 먹을 죽처럼 생겼다는 의미에서 꿀꿀이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워낙 음식이 부족했던 시절엔  미군이 먹다 버린 소시지, 보급용 껌, 심지어 곰팡이가 낀 잔반까지 죄다 한 통에 넣고 끓여 먹었다. 때문에 꿀꿀이죽을 먹고 집단 식중독에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964년 5월 20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꿀꿀이죽을 아십니까' 기사. [사진 삼양식품]

1964년 5월 20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꿀꿀이죽을 아십니까' 기사. [사진 삼양식품]

지금은 세계적인 음식으로 발돋움한 한국 라면은 아이러니하게 꿀꿀이죽 때문에 탄생했다. 삼양식품의 창업자인 고(故) 전중윤 명예회장은 1960년대 남대문시장에서 꿀꿀이죽을 먹으려고 줄지어 서 있는 노동자를 목격했다. 비위생적인 꿀꿀이죽으로 한 끼를 때우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라면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꿀꿀이죽 대체…식량난 해결 목표

1950년대 말 보험회사를 운영했던 전중윤 명예회장은 일본 방문 당시 라면을 맛본 적이 있었다. 조리가 간편한 라면을 대규모 보급한다면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의 묘조(明星)식품에서 라면 제조 기계·기술을 도입한다. 이렇게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 라면이 탄생한다.

연노란색 봉지에 닭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디자인을 채택한 국내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의 중량은 100g이었다. 당시 일본 라면 평균 중량(85g)보다 15g 많았다. 가격(10원)도 당시 꿀꿀이죽(5원)보다 5원 비싼 수준으로 책정했다.

당시 커피(35원)·담배(25원) 시세보다 저렴했다. 이에 대해서 삼양식품은 “식량난으로 굶는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라면을 먹을 수 있도록 저렴하게 가격을 책정했다”고 설명했다.

삼양라면 초기 제품사진. 왼쪽부터 1963년 제품, 1964년 제품, 1965년 제품. [사진 삼양라면]

삼양라면 초기 제품사진. 왼쪽부터 1963년 제품, 1964년 제품, 1965년 제품. [사진 삼양라면]

어렵게 라면을 개발했지만, 초기 반응은 냉담했다. 1963년 최초 출시 당시 삼양라면은 닭고기 육수를 기반으로 제조했다. 당시에는 제조가격을 고려하면 소고기·돼지고기로 육수를 우려낼 만큼 원료를 조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쌀 중심의 식생활 문화도 라면 활성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당시엔 라면을 옷감이나 플라스틱의 일종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삼양라면 초기 라면 광고. [사진 삼양식품]

삼양라면 초기 라면 광고. [사진 삼양식품]

삼양식품은 극장·공원에서 무료시식 행사를 열어 라면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때마침 1965년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혼분식(混粉食) 장려운동을 실시한다. 혼분식 장려운동은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밥에 보리쌀·면류를 25% 이상 혼합 판매하도록 장려하는 정책이다. 1977년까지 시행한 이 정책 덕분에 삼양라면은 판매량이 급증했다.

1966년 11월 한 달 동안 240만 봉지였던 삼양라면 판매량은 1969년 들어 월평균 1500봉지로 크게 늘어난다. 라면 개발 초창기 매출액과 비교하면 무려 300배나 매출이 늘었다. 갈수록 판매량은 급증했다. 1972년 삼양라면 매출액(141억원)을 당시 소비자가격(22원)으로 환산하면 1년 만에 약 7억 봉지가 팔렸다.

국내 인기에 힘입어 삼양식품은 1969년 국내 최초로 베트남에 라면을 수출했다. 당시 연평균 라면 수출금액은 150만달러(18억3000만원)였다. 1972년에는 동남아 지역 수출액이 250만달러(30억5000만원)를 돌파했다. 지금은 60여개 국가에 삼양라면을 수출한다.

삼양식품이 국내 최초로 일본서 도입한 라면 생산 기계. [사진 삼양식품]

삼양식품이 국내 최초로 일본서 도입한 라면 생산 기계. [사진 삼양식품]

우지 파동 이후 농심 역전극

국내·외에서 승승장구하며 라면시장을 선도하던 삼양식품은 이른바 ‘우지(牛脂)사건’으로 위기를 맞는다. 우지는 소의 지육(脂肉)에서 얻은 지방이다. 서울지검 특수2부는 1989년 11월 3일 보건범죄단속에관한특별조치법과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삼양식품 등 5개 식품업체 대표와 실무자를 구속했다. 16등급의 우지 중에서 삼양식품이 라면 튀김 원료로 사용한 우지(2·3등급)가 공업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사건 발생 12일 만에 보건사회부 장관이 우지를 사용한 라면은 무해하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삼양식품은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었다. 이로 인해 1000여명의 직원이 실직하기도 했다.

삼양라면을 시식하는 삼양식품 직원들. [사진 삼양식품]

삼양라면을 시식하는 삼양식품 직원들. [사진 삼양식품]

7년 9개월간 법정공방을 거쳐 삼양식품은 우지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보건사회부 산하 검역소의 식품검사를 받은 위생상 안전한 우지는 식용 가능하다’고 매듭지었다.

1980년대 중반 농심과 라면 업계 1위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삼양식품은 우지사건으로 농심에 완전히 밀렸다. 정보분석 기업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해 삼양라면은 국내 라면 시장에서 8위를 차지했다(연간 판매량 기준). 1위(신라면)·2위(짜파게티)·4위(안성탕면)·5위(육개장사발면)·7위(너구리)를 차지한 농심에 비하면 다소 초라한 성적표다.

하지만 대법원의 무죄 판결에도 삼양식품은 국가를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삼양식품은 “이미 끝난 사건에 얽매이기보다는 삼양식품의 추락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라면시장 순위. 그래픽=박경민 기자

지난해 라면시장 순위. 그래픽=박경민 기자

라면 국물 마시며 오로라 감상 

역대 삼양라면 포장지. [사진 삼양라면]

역대 삼양라면 포장지. [사진 삼양라면]

우지 파동의 위기를 극복한 삼양식품은 2017년 브랜드 확장에 나선다. 그해 8월 최초로 ‘삼양라면 매운맛’을 출시했다. 삼양라면 오리지널 제품 대비 청양고추 성분을 가미하고 후추를 2배가량 더 첨가했다. 또 라면 플레이크에는 홍고추를 추가했다.

최근에는 세븐일레븐과 협업해 ‘삼양라면 1963’ 스페셜 패키지를 출시했다. 1963년 국내 최초로 등장한 라면인 삼양라면 패키지를 그대로 재현한 상품이다. 당시 사용했던 로고·서체와 패키지 디자인을 똑같이 재현했다.

캐나다 오로라빌리지에서 판매하는 삼양라면. [사진 삼양식품]

캐나다 오로라빌리지에서 판매하는 삼양라면. [사진 삼양식품]

해외에서도 적극적인 마케팅을 진행 중이다. 삼양식품은 2018년 4월 캐나다 옐로나이프 ‘오로라 빌리지’에 입점했다. 옐로나이프는 미국 항공우주국이 선정한 세계 최고의 오로라 관측지다. 한국 라면 중 오로라 빌리지에서 판매하는 라면은 삼양라면이 유일하다. 오로라 빌리지는 5캐나다달러(4000원)에 삼양라면을 판매한다.

삼양식품은 “앞으로도 글로벌 시장에서 다양한 협업을 시도하면서 국내 최초 라면을 글로벌 시장에 널리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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