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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학가의 대자보|북의 변화와 미 전 외교관의 방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금년도 국제사면위원회 인권보고서는 지난해 여름 평양 대학가에 북한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 대자보와의 관련 혐의로 교수·학생 4O여명이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여름 천안문 유혈사태가 있은 이후 중국은 물론 동구 공산국가들에서 유학 중이던 학생들을 모두 철수시켰다는 소식도 전해오고 있다.
이 두 가지 뉴스에서 우리는 외부세계와 철벽을 쌓고 살아온 북한에도 공산세계 전반에서 일고 있는 개혁의 바람이 스며들고 있으며 이를 막아 보려는 노력이 높아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개혁의 바람은 적어도 당장은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지 못하며 오히려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이 보이고 있는 것과 같은 폐쇄의 방향으로 가고 있음도 분명하다.
이러한 배경을 놓고 볼 때 최근 개스턴 시거 전미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가 평양에 간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시거는 레이건 행정부 아래서 동아시아 문제에 관한 한 최고 실무책임자였고 두달전 서울을 방문한 카피차 전소련외무부 아시아담당 차관과는 주기적으로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인물이다.
이들이 짧은 기간 안에 서로 서울과 평양을 교차적으로 방문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진 모르나 그 의미는 크다고 본다.
미국정부는 지난해 이래 적어도 세차례에 걸쳐 북경에서 외교접촉을 가졌었다. 공식 성명으로는 이 접촉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인자격」임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시거와같은 인물이 이때에 평양을 방문하게 된 것은 북경 접촉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미·북한 접촉이 양자간의 관계를 은밀히 진전시키려는 의도로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런 연계성 속에서 우리는 카피차의 서울 방문과 시거의 평양방문이 남북한 사이에 조심스럽게 재개되고 있는 공식접촉에 촉매가 될 수있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는 북한의 변화에 있다고 본다. 평축을 전후해 북한이 시도한 공작차원의 대남 전략은 실패였음을 그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 헝가리가 동서간의 철조망을 허물어 뜨려 동독인의 서독 이주를 가능케 했고, 폴란드가 철의 장막을 더 이상 인정치 않겠다는 외교정책을 제시했으며, 개혁의 바람을 억제하려한 동독 지도층이 국민들로부터 배척 당하고 있는 등의 변화를 북한은 남의 일로 봐서는 안될 것이다.
4O여 년 간 북한이 안주해온 이념의 벽은 곳곳에서 허물어져 내리고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스탈린주의의 실패를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 자체에서 인정한데서 나오는 강풍인 것이다.
평양 대학에 나붙은 대자보는 북한이 계속 유지하려는 「철옹성」도 이 바람을 더 이상 막을 수는 없다는 적신호라 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가 동유럽 공산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탈 이념의 여러 변화를 묵인하고 있는 사실을 북은 잘 해석해야 될 것이다.
이같이 변화의 물결이 불가피한 추세이며 이를 거역하는 것은 남북관계뿐 아니라 북한의 정권과 체제까지도 위협하게 된다는 현실 인식을 북의 지도층이 받아들일 때 다시 시작되고 있는 남북간의 공식접촉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거가 평양방문에서 이점을 북측 지도층에게 설득하는데 일조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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