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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대통령을 만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오늘(29일 현지시각) 일정은 조금 여유가 있다. 불과 200마일(330㎞)을 달리기 때문이다.

어제 사우스 다코다 스피어피시 호텔에 밤 9시 도착해 간단히 컵라면과 김치로 늦은 저녁식사를 때웠다. 기사 마감이라 도저히 저녁 먹을 여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배에 들어간 마늘과 매운 기운이 대장을 강타했나 보다. 배가 쓰리게 아프다.

이번 호그 멤버는 환상적이다. 이럴 땐 B조 로드 마스터인 이상연 원장을 찾아가면 된다. 역시 예상대로 위장약을 갖고 오셨다.

참고로 A조 윤명수 회장 방에 가면 없는 게 없다. 이민 가방에 진짜 라면은 물론, 우동부터 청국장.된장찌개.갈비탕, 여기에 소주 안주용 오징어와 골뱅이.꽁치 캔까지 말 그대로 한 달치 식량은 충분하다. 간이용 전기 포트도 장만해 꽁치 김치찌개가 가능하다. 그러니 한 잔 좋아하는 기자가 이 방을 마다할 리 있겠는가. 윤 회장과 한 방을 쓰는 구희주 회장은 이름 그대로 타고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멋지게 시가를 즐기신다. 한 잔 하시다 보면 어느 순간 앉은 자세로 조용해진다. 그리고 20여분 후 고개를 든다. 앉은 자세로 아무도 모르게 숙면을 취하는 놀라운 회복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항상 구수한 농담으로 자리를 빛내주시는 이종배 회장은 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로드마스터인 가우드씨에게 "왜 그리 천천히 달려"라고 자주 말을 건다.

역기로 다져진 팔뚝을 뽐내시는 남일 부회장은 항상 여유롭다. 기자와 마찬가지로 타는 것은 모두 좋아하는 마니아다.

이런 재미있는 분들이 모인 A조는 안줏거리가 풍부한 덕에 매일 저녁 소주 파티를 즐긴다. 그렇다고 폭탄주를 몇 잔씩 먹는 것은 아니다. 숙면을 위한 간단한 담소 자리라고 할까.

오늘은 그 유명한 민주화의 상징인 네 명의 대통령 얼굴이 조각된 러시모어 국립공원을 라이딩한다. 현지 스터기스시(市) 호그 멤버들이 안내를 맡았다. 아침식사는 간단히 빵과 커피로 해결하고 오전 7시 출발이다.

오늘도 A조와 동행한다. 애마(愛馬)는 '스트리트밥'이다. 핸들이 조금 높게 올라온 멋진 디자인의 바이크다. 탠덤(뒷좌석)용 자리와 가방이 달려있지 않아 조금 불편하지만 멋쟁이임에는 틀림없다. 할리는 말 달리는 소리를 재현한 것도 그렇고 시트도 말 안장과 거의 흡사하다. 안장에 앉아 몸을 직각으로 세우고 타면 말 타는 느낌이 난다. 뒤에 다는 보조 가방도 이런 전통 때문에 '새들 백'이라 부른다. 서부 시대 말에 얹던 가방이다.

스피어피시에서 30여분 떨어진 스터기스시는 인구 6만5000명의 진짜 소도시다. 그런 이곳이 1930년대부터 할리 투어의 성지로 변했다. 물론 러시모어 국립공원의 진입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 시장이 모터사이클 투어를 중심으로 한 관광도시로 바꾼 것이다. 8월 6일부터 300여대의 모터사이클이 참가하는 랠리가 열린다.

시라고 해봐야 모두 10분 거리면 갈 수 있을 정도다. 진짜 조그만 시티홀에 잠시 들러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번 대륙 횡단에선 한.미간 민간 외교라는 중요한 역할도 맡고 있다. 가는 식당마다 미국인들이 반긴다. 한국인들이 할리를 타고 대륙을 횡단한다는 내용이 새겨진 기념 티셔츠를 보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온다. 한결같이 미국의 상징인 할리를 한국인이 탄다는 것에 대해 기분 좋아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현지 호그 멤버들과 우정을 나눈다.

오전 10시쯤 스터기스 할리 딜러샵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현지 호그 멤버와 만나기로 했다. 한 시간 정도의 휴식 동안 20여 명의 회원들은 '이 때를 놓치랴'하며 쇼핑에 나섰다. 같은 제품이 한국보다 무려 40~50% 정도 싸다. 라이딩용 신발부터 헬멧.기념티.벨트까지 한국의 큰손들이 다녀가신 흔적을 남겼다

이윽고 간단한 브리핑 시간. 현지 호그 멤버 4명(부부 두 쌍)이 A.B조를 나눠 이끌기로 했다. 러시모어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를 벗어나면 작은 오솔길을 만난다 (한국의 예쁜 오솔길과는 규모가 다르게 큰 길이다. 오솔길이라는 말 대신 우리식 국도가 더 어울릴듯 하다). 지그재그 코너를 즐길 수 있는 이 길을 바이크로 달린다. 너무나도 낭만적이다.

하지만 이런 낭만을 못살게 구는 문제가 있으니, 다름아닌 살을 태우는 햇살이다 (밤에 기자는 기사를 쓰면서 얼음 찜질을 해야 했다. 선탠 로션이 발라지지 않은 곳은 그야말로 심한 화상이다. 목 부위 어딘가가 닿을 때마다 쓰리다).

바이크를 주차장에 세우고 대통령 조각을 정면으로 보기 위해 기념관으로 향했다. 함께 걷는 길에 로드 마스터인 미국인 가우드씨가 설명을 해준다. 초대 대통령부터 1941년까지 대통령 가운데 여론조사 등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얼굴조각이다. 좌측부터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디어도어 루즈벨트(미국의 26대(1901~1909) 대통령.뉴딜 정책의 프랭클린 루즈벨트와는 다른 인물이다).에이브러햄 링컨 순으로 조각됐다.

'자유:미국에 이어지는 전설'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이들 네 명의 대통령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디어도어 루즈벨트는 조금 다른 경우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했고 당시 거대 기업들이 명승지를 사유화하는 것을 막아 곳곳에 국립공원을 지정한 공로가 커 선정됐다. 그가 아니었다면 러시모어뿐 아니라 옐로스톤.그랜드캐년이 없을 수도 있었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가우드씨의 한국인 부인은 대단한 미인이다. 이번 횡단에서 명승지가 나오면 가우드씨가 모는 '울트라 클래식' 바이크에 탠덤해 다정한 부부애를 보여준다. 미국에서도 시골로 유명한 사우스 다코다의 시골 도시에는 대통령 조각 덕분에 연간 30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물론 대부분 미국인이지만 말이다.

지금은 이들 대통령 조각 뒤편에 이곳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의 전설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이 진행되고 있다. 인디언을 몰아낸 미국인들이 민주화의 상징이라며 대통령의 얼굴을 새긴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이유로 인디언들이 거세게 항의, 현재 조금씩 크레이지 호스의 전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조각은 말을 타고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모습이 새겨진다고 한다. 전액 기부금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기자도 작은 돈이지만 기부를 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인디언의 역사, 참으로 아이러니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현재 그의 얼굴이 완성됐다. 인디언의 땅에 세워진 미국 대통령의 조각을 바라보는 이곳 원주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그리고 한국 대통령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모든 것을 한국인의 업보로 돌려야 하나.

점심은 이곳의 특산물(?)인 버펄로(미국 소) 햄버거로 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버거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진짜 꿀맛이다.

이윽고 러시모어 국립공원 라이딩에 나섰다. 산길을 올라가는 재밌는 코스다. 하지만 할리코리아 이계웅 사장이 가장 평범한 코스를 택했다. 안전 때문이었지만 회원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구불구불 코스에선 말과 소들이 가끔 얼굴을 내밀어 우리 일행을 세운다.

그러나 정작 불볕 더위 때문에 제대로 경치를 감상하지 못했다. 한국의 지리산이나 설악산 올라가는 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크기만 클 뿐 볼 것은 별로 없다. 섬세하고 운치있는 우리 경치를 본 외국인들의 감탄이 이어지는 이유를 알 만하다.

라이딩을 끝내고 또 햄버거와 스테이크로 저녁을 때웠다. 아니 위장 안에 넣었다고 해야 맞겠다. 미국에선 그 비싼 '립아이'스테이크가 25달러(2만3000원)이면 충분하다. 감자와 샐러드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매일 콜라에 버거에 스테이크까지... 이번 투어에서 감량하겠다는 다짐은 물거품이 된지 오래다.

참고로 할리를 타는 호그 회원들은 대부분 배가 나온다고 한다. 맛있는 곳을 찾아 다니면서 먹고 그 다음에 또 앉아서 한참 길을 가고... 그러니 배 안나 올 장사가 있겠는가.

스피어피시 호텔(꼭 방갈로 산장 같다)로 돌아가는 주행길은 밤길이다 (오토바이는 시동만 걸면 헤드라이트가 무조건 켜진다).

밤길 주행의 가장 큰 위험은 산짐승이다. 소나 말은 물론 사슴과 오소리 등 각종 동물이 수시로 출현한다. 지난해 한국 호그 멤버가 미국의 고속도로 주행에서 소에 부딪혀 부상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속도를 시속 80㎞ 이하로 줄였다. 한 시간 정도 라이딩 끝에 인적 드문 호텔에 도착했다. 다행히 짐승들은 구경하지 못했다. 엿새째 밤은 이렇게 지나간다.

쿠어스 맥주 한 병을 테이블에 놓고 기사를 정리한다. 내일은 몬타나 빌링스까지 가는 526㎞ 구간이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기다린다. 크레이지 호스의 전설이 꿈에 나타나길 기원하며 잠을 청한다.

스피어피시=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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