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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만큼 심각한 사법월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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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기자·변호사

임장혁 기자·변호사

오랜 진지전의 시기가 있었다. 2011년 국제인권법연구회(이하 인권법)의 탄생부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진 2017년 이전까지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형해화된 우리법연구회(이하 우리법) 출신과 ‘강기갑 공중부양 사건’ 무죄 판결로 유명해진 이동연 등 소장그룹이 뭉친 인권법은 ‘호남 엘리트’ 색이 짙던 우리법과는 시작부터 달랐다. 무등록·비공개로 운영된 우리법이 언더서클이라면 인권법은 법원행정처에 등록해 예산을 받는 대중조직이었다. 수평적 분위기에 간사와 회장을 경쟁 선출하는 구조를 짜면서 회원수는 창립 5년만에 400명을 넘었다.

2015년은 연구와 친목이 법관 정치로 나아간 분기점이다. 상고법원에 올인하는 ‘양승태 체제’에 도전하는 정치그룹(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이 구성됐고 재판을 통한 사실상의 집단행동도 본격화됐다.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양산이 대표 사례다. 2017년 김영식 판사(현 법무비서관)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2014년 학술대회 후 ‘유무죄 판단은 법원 고유 권한인데 굳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재판이 곧 정치라고 해도 좋은 측면이 있다”는 인권법 소속 판사(오현석)의 같은 해 발언도 이들의 내심을 엿보인 사례다.

노트북을 열며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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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은 인권법이 진지전을 기동전으로 전환한 시기다. 언론은 법원행정처 기조심의관으로 발탁된 이탄희의 원대복귀와 대법원 재판연구관 이수진의 지방 전보 등을 기화로 촉발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집중했지만 ‘사법 혁명’의 도화선이 된 건 인권법 간사출신 김형연(현 법제처장)의 청와대 법무비서관 직행이었다. 우리법을 대신할 새로운 사법 정치 파트너가 필요했던 문재인 정부의 합리적 선택인 셈이다. 인권법 초대 회장 김명수 춘천지법원장이 대법원장에 발탁된 이후론 일사천리였다. 대법관에 노정희·김상환, 헌법재판관에 유남석 소장 외 이미선·김기영·문형배 등 우리법·인권법 출신들이 줄줄이 임명되면서 사법의 좌향좌는 끝났다. 김형연의 법제처장 기용으로 빈 법무비서관 자리는 다시 인권법(김영식) 직행으로 채워졌다.

민주당은 이미 입당한 이탄희·이수진에 이어 우리법 회장 출신 최기상까지 출마시킬 작정이다. 사법·행정을 접수한 일군의 판사집단에서 국회 직행을 노리는 사람이 나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다만 이들이 양승태 체제를 몰아낼 때 앞세운 명분이 ‘법관의 독립’이었다는 게 새삼 우스울 뿐이다. 삼권분립의 실질이 법관의 독립이고 법관 독립의 요체가 ‘정치와의 거리’라는 건 중학생 정도면 아는 일이다.

임장혁 기자·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