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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전 남노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1부 독립을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중앙고보는 진주고보와는 반대로 일본인 선생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인 선생들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을 자기 아들이나 동생같이 아끼며 사랑했다. 그뿐 아니라 가르치는 태도도 정열적이고 진지했다.
역사시간이 아닌데도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인 을지문덕 장군·강감찬 장군·이순신 장군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처럼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킨 영웅들의 이야기를 처음 들을 때 나의 심장은 거세게 고동쳤다.
중앙고보 3학년에 전학해 처음으로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그때까지는 매번 신문사가 주최하는 계몽운동이 진행되었다. 그것을 당시 「브나로드」운동이라 했다. 「브나로드」란 말은 러시아어로 「인속민으로」라는 말인데, 제정러시아 말기 나로드니키(인민파)들이 낙후한 러시아를 개화하기 위해 전개한 계몽운동을 말했다.
동아일보사에서 귀성하는 학생들에게 교재를 배포해준다고 해 가보니 사장 송진우씨를 비롯, 윤치호씨 등이 나와 있었던 것이 지금 기억에 남아 있다. 윤치호씨는 그때는 아직 일본에 굴복하기 전의 명망 높은 민족지도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 그의 얼굴은 깨끗해 보이며 그의 턱수염까지 위엄이 있어 보였다.
이 「브나로드」의 교재를 가지고 시골에 가도 이때는 이미 경찰의 탄압이 심해 공공연하게 시골 농민들을 모아 가르칠 수는 없었다. 숨어서 농민들에게 교재를 나눠주며 서너 사람씩 소규모로 모여서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브나로드」운동도 아마 이 해가 마지막이 된 것 같은 기억이 난다.
나는 서울에 와서 진주에서는 볼 수 없는 서양영화와 연극을 일부러 많이 보았다.
서양영화는 책으로써는 알 수 없는 서양사람의 생활과 문화를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특히 프랑스 배우 알베르 프레장이 좋아 그가 출연한 『도도』 『상선테나시티』 『파리의 지붕 밑』을 보러 다녔다. 연극은 나에게 우리 조선말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가르쳐 주었다. 무대 배우들의 서울말은 나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3학년 2학기 맑은 가을 어느날이었다. 책가방을 어깨에 걸고 학교에서 계동 골목을 무심히 내려와 휘문고보운동장 담장까지 오니 앞에서 『야! 박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쳐다보니 양쪽 귀가 손바닥만한 키가 큰 신사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진주에서 호걸로 이름난 정재화라는 사람이었다.,
그때 독일에서 히틀러가 한창 득세할 때라 정씨의 귀가 크다고 「귀틀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교제가 넓어 독립운동가, 친일파 할 것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박군! 내가 지금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러 가는데 자네도 같이 가세! 그런 어른은 알아두는 것이 좋네!』하며 다짜고짜로 나를 끌고 갔다.
몽양의 집은 중앙고보를 향해 계동 골목으로 가다 휘문고보 운동장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푸른 칠을 한 조그마한 2층 집이었다. 여운형은 그때 조선중앙일보사장으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동대문운동장에서 몇 번 본 일이 있었다.
정씨는 이웃사람에게 다 들릴만한 큰소리로 『몽양 선생!』하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공손히 절을 하고 얼굴을 들어보니 운동장에서보다 방안에서 보는 여운형은 더 커보였다. 정씨도 몸이 큰사람인데 그보다 더 몸집이 커보였다. 그의 풍채가 좋은데 나는 압도당했다.
정씨는 아직 중학생인 나를 소개하며 『장래 유망한 민족간부가 될 아이이오니 몽양 선생이 잊지 말고 갈 지도하여 주십시오』하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몽양과 나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코피를 먹어본 것도 그때 몽양 집에서가 처음이었다.
그후 여운형에 대한 접촉도 많았고 감상도 복잡하다. 내가 지금도 그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높은 나무는 늘 바람을 탄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그는 늘 흔들리는 사람, 동요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도중에 생명을 잃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세한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3학년 때인 1934년 겨울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겨울에는 서울에 큰불이 두번이나 난 것을 기억한다. 내가 다니는 중앙고보에 큰불이 났고 화신백화점에도 큰불이 났었다. 나는 그때 중앙고보에서 가까운 가회동에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중앙고보에 불이 났다고 해 놀란 나머지 아침밥도 먹지 않고 뛰어가 보았다.
교사 세채중 한가운데 있는 본관이 모두 타버려 붉은 벽돌벽만 남아있었다. 그것을 보자 왜 그런지 눈물이 저절로 솟아올랐다.
경찰에서는 이 화재를 구실로 하여 화재원인과 방화범을 색출한다고 4학년과 3학년 학생을 많이 잡아갔다.
결국 방화범은 색출하지 못하고 소위 사상이 불온하다는 학생들만 학교를 쫓겨나고 말았다. 그래서 시국에 협력하지 않는 중앙고보를 탄압하기 위해 경찰에서 방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까지 있었다.
나는 일본의 식민지 노예화 교육을 받기가 싫어서 공립중학교에서 일부러 서울의 사립중학교로 전학했는데 일본 식민지 통치자들은 이 조그마한 사립중학교까지 불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아무 죄 없는 중학생들까지 잡아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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